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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로 떠나는 여행
창녕 모곡제방에서 바라본 쪽지벌
그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 정도로 생각된다. 퀴퀴한 냄새나 달라붙는 벌레 때문에 저곳을 왜 갈까 싶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온갖 생명이 꿈틀대는 곳이다.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생명체가 바글바글 삶을 영위한다. 거기에 분위기는 덤이다. 새벽 안개와 일몰 풍경으로 몽환적인 분위기가 펼쳐진다. 습지로 떠나는 여행이라면 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자연의 보고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생각하면 된다. 도시의 깔끔함을 잠시 내려놓고, 몸에 흙 좀 묻히고, 물 좀 튀길 생각은 해야 한다. 몰랐던 세상을 마주하는데 이 정도 불편함은 당연할 듯싶다.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말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여름철 제 빛을 발하는 습지 중 보호해야 할 가치가 큰 람사르협약 등록 습지를 여행지로 소개했다.


창녕 이른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른 우포늪
‘세계적 생태천국’ 우포늪… 1000여종의 생명체 ‘꿈틀꿈틀’


경남 창녕 우포늪은 온갖 생명의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개구리밥, 마름, 생이가래 같은 수생식물이 세력을 넓히고, 새하얀 백로가 얕은 물가를 느긋하게 거닐며 먹이 활동을 한다. 우포늪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 내륙 습지다. 1억4000만년 전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만들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늪에 1000종이 넘는 생명체가 서식한다. 국내 수생식물 50∼60%가 이곳에 산다.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람사르협약 보존 습지로 등록됐고,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잠정 목록에도 등재됐다. 람사르협약은 물새가 서식하는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1971년 이란 람사르에서 채택된 국제조약이다. 우포늪은 제방을 경계로 우포, 목포, 사지포, 쪽지벌 등 4개 자연 늪과 2017년 복원 사업으로 조성한 산밖벌까지 3포 2벌로 나뉜다. 우포가 가장 크고 목포가 다음이다. 

창녕 사지포제방에서 조금 올라가면 일몰 포인트로 유명한 팽나무, 일명 사랑나무를 만난다.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소를 닮아 우포(소벌), 홍수 때 나무가 많이 떠내려왔다고 목포(나무벌), 모래가 많아 사지포(모래벌), 규모가 작아 쪽지벌이다. 본래 하나였는데 제방을 쌓고 주변 땅을 농경지로 만들면서 나뉘었다.

쪽지벌은 규모가 작아도 우포늪 전체의 축소판이라 할 만큼 다양한 동식물이 살아간다. 고기잡이배 두세 척이 묶인 소목나루터는 안개 낀 새벽에 특히 몽환적이다. 사지포제방은 일몰 무렵에 찾으면 좋다. 우포와 쪽지벌 사이에 넓게 자리한 사초 군락, 사초 군락에서 목포제방 쪽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우포와 목포의 경계에서 두 늪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목포제방도 주요 탐방 포인트다.

무안 간조때의 무안갯벌과 어선
황토 머금은 청정 무안갯벌… 혹부리오리 등 철새들의 보금자리


전남 무안갯벌은 넓고 비옥하다. 간조 때 갯벌은 깊은 주름을 만들고, 갈라진 골은 삶의 공간과 맞닿아 있다. 침식된 황토와 사구의 영향으로 형성된 무안갯벌은 우리나라 바다 습지의 상징적 공간이다.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람사르 습지(1732호)와 갯벌도립공원 1호로 지정됐다.

무안갯벌의 대표 지역은 해제반도가 서해를 품에 안은 함평만(함해만) 일대다. 함평만의 340여㎢에 달하는 갯벌은 칠산바다와 만나며 품 넓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황토를 머금은 기름진 공간은 갯벌 생명체의 보금자리이자 물새의 서식처다. 흰발농게와 말뚝망둥이 등 저서생물 240여종, 칠면초와 갯잔디 등 염생식물 40여종, 혹부리오리와 알락꼬리마도요 등 철새 50여종이 갯벌에 기대어 살아간다. 여름이 시작되면 무안갯벌은 칠면초로 군데군데 뒤덮이며 검고 붉은 향연을 펼친다.

무안 황토갯벌랜드와 무안갯벌
무안갯벌 위로 이어진 탐방로와 산책로에 동식물 모형과 설명이 곁들여져 아기자기하게 걷는 재미가 있다. 데크에서 내려다보면 구멍 사이로 갯벌 생물이 빠르게 움직인다. 무안갯벌에서는 갯벌을 보호하기 위해 바다에 함부로 들어설 수 없다. 갯벌 체험이 가능한 공간은 중앙 낙지 동상 뒤쪽에 마련된 갯벌체험학습장이다. 체험학습장에 발을 디디면 발가락 사이, 코앞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도둑게, 망둥이 등을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 람사르 습지 1호’ 용늪… 국내 단 하나뿐인 고층습원

강원 인제 대암산 정상 부근 용늪은 국내에서 유일한 고층습원(식물 군락이 발달한 산 위의 습지)이다. 1997년 우리나라 최초 람사르협약 습지로 등록되었다.

인제 용늪의 담비
용늪 탐방은 대암산 동쪽 인제와 서쪽 양구에서 각각 출발한다. 아이와 함께라면 차량으로 용늪 입구까지 이동하는 인제 가아리 코스가 좋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용늪을 둘러보고 대암산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등산로는 비교적 평탄하지만 막바지에 밧줄을 잡고 올라야 한다.

가장 다양한 생물을 볼 수 있는 탐방 적기는 여름이다. 용늪이란 이름은 ‘승천하는 용이 쉬었다 가는 곳’이란 전설에서 유래했다. 습지보호지역을 가로지르는 탐방 데크를 사이에 두고 큰용늪과 작은용늪, 애기용늪이 있다. 융단처럼 자란 습지식물이 바람에 따라 출렁이는 습지 전체 면적은 1.06㎢에 이른다. 해발 1000m가 넘는 산지에 용이 쉬어 갈 만한 늪이 생긴 것은 4000~5000년 전이다. 

인제 용늪의 산양
전체가 바위투성이인 대암산 정상부는 1년에 5개월이나 기온이 영하에 머물고, 안개가 자주 낀다. 춥고 습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바위로 스며든 습기가 풍화작용을 일으켜 우묵한 지형이 만들어졌고, 여기에 빗물이 고여 습지가 생겨난 것이다. 바위 지형에 빗물이 고였다고 곧바로 다양한 생물이 둥지를 트는 건 아니다.

용늪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죽은 식물이 채 썩지 않고 차곡차곡 쌓인 이탄층이다. 이탄층이 켜켜이 쌓인 뒤에 비로소 여러 생물이 자리를 잡았다. 특이한 지형과 기후 덕분에 끈끈이주걱과 비로용담, 삿갓사초 같은 희귀 식물이 군락을 이뤘다. 산양과 삵, 하늘다람쥐 같은 멸종 위기 동물도 산다. 용늪을 탐방하기 위해서는 미리 방문 신청을 해야 한다. 인제군 생태관광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다.

고창 물을 머금은 땅이 나타나니 비로소 운곡습지에 온것을 실감한다.
폐경지서 자연 스스로 피어난 운곡습지… 원시 비경에 무한 감탄


자연은 스스로 피어난다. 전북 고창 운곡습지에 필요한 건 무관심이었다. 사람 발길이 끊긴 지 30여년이 된 2011년 4월, 버려진 경작지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꽉 막힌 대지에 물이 스며들고 생태계가 살아났다. 멸종 위기에 처한 수달과 삵이 갈대숲을 헤쳐 물고기를 잡거나, 배설물을 남겨 이곳이 터전임을 알린다. 1981년 전남 영광에 한빛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다. 발전용 냉각수를 공급하기 위한 운곡댐이 건설됐고, 고창군 아산면을 관통해 지나가는 주진천을 댐으로 막아 운곡저수지가 생기면서, 운곡리와 용계리가 수몰됐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폐경지는 원시 모습을 되찾았다.

고창 원시습지 형태로 복원된 운곡습지의 모습
운곡습지 탐방은 안내소를 기점으로 출발하는데, 고인돌유적지 탐방안내소에서 1·3코스가, 친환경주차장에서 2·4코스가 시작된다. 1코스(3.6㎞)는 운곡습지생태연못, 생태둠벙을 거쳐 운곡람사르습지생태공원까지 이어진다. 거리가 가장 짧아 일반적으로 선호하는 코스다. 습지 탐방은 습지 보호용 신발 털이개에 신발을 털면서 시작된다. 신발에 묻은 생태 교란 외래종 식물이 습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습지 탐방로는 한 사람이 지나갈 너비의 나무데크로 조성되었다. 타박타박 걷다 보면 지천으로 깔린 고마리가 눈에 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어리연꽃, 낙지다리, 병꽃나무, 익모초, 노루오줌 등 푸른 숲으로 통칭할 수 없는 ‘생명의 세계’가 바로 운곡습지다. 현재 네 코스가 모두 만나는 지점에 운곡람사르습지생태공원을 조성 중이다.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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