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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중국 청춘 서러움, ‘흙수저’와 다를 바 없어”

입력 : 2020-05-17 20:23:17 수정 : 2020-05-18 10: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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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만약 내가 진짜라면’ 무대 올리는 김재엽 연출가 / 문화대혁명 휩쓸고 지나간 中 배경 / 극작가 사예신 대표작으로 국내 초연 / 주인공, 고위직 아들 사칭사건 ‘눈덩이’ / “공연 준비 내내 개막 여부에 가슴 졸여 / 기약 없이 생업 중단된 것 제일 걱정 / 예술가 생존 도울 수 있는 지원 있어야”

연출가 김재엽은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주목받는 연극인이다. 가족사를 통해 굴곡많은 현대사를 조명한 ‘알리바이 연대기’와 ‘자본’, ‘검열언어의 정치학’ 등 동시대와 호흡하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신작 ‘만약 내가 진짜라면’ 초연을 앞둔 연출가 김재엽. 코로나 위기를 겪은 연극계에 대해 말하던 그는 “연극하는 사람끼리 관계에 대한 솔직한 얘기들이 사실 필요해요. 그동안 바뻐서 정신없었다면 지금은 연극하는 의미가 어떤 것일까. 생존의 위기에서 모두가 연극이나 예술을 부차적으로 생각하는데 이게 우리에겐 어떤 의미였는지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더욱 소중해졌으니까”라고 말했다.  이제원 기자 

그가 이번엔 문화대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중국을 무대로 한 ‘만약 내가 진짜라면’을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으로서 무대에 올린다. 중국 극작가 사예신 대표작으로 국내 초연이다. “중국 권력이 마오쩌둥에서 후야오방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문화대혁명은 결국 통제와 검열, 국가주의에 의한 국민 억압으로 끝났습니다. 문혁 실패 후 어떤 방향으로 변화를 끌고 가야 하는지 모색하는 시기를 다룬 이야기입니다. 혁명이 끝나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제대로 바꾸지 못하면 다시 적폐문제가 대두합니다. 그리되면 혁명에 힘을 보탠 젊은이들이 실제 얻은 결과물은 그저 기득권 교체에 불과하고, 약자는 여전히 약자이고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상태가 되는 거죠. 그런 대목이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금수저는 계속 금수저, 흙수저는 계속 흙수저로, 젊은이에겐 여전히 기회가 부족하고 근본적 체질 개선이 아직 안 이뤄지고 있으니….”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문혁에 휩쓸려 농촌에서 하릴없이 노동에 복무해야 하는 청년 리샤오장이다. ‘빽’좋은 친구들은 슬슬 도시로 귀환명령을 받으나 리샤오장에겐 꿈같은 얘기다. 그러던 어느날 우발적으로 고위직 아들인 척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자유당 정권 당시 이승만 대통령 양자 이강석을 자처한 사기꾼이 전국을 순회한 이래 고위층 사칭 사건이 끊이지 않는 우리나라에도 익숙한 설정이다.

 

국내 초연에선 극작가 사예신을 극중인물로 무대에 직접 등장시켜 해설과 지시문을 내레이션과 대사로 전달하고, 리샤오장의 여자친구가 처한 상황과 성격에 변화를 주는 등 적극적인 각색을 통해 2020년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동시대적 관점에 좀 더 집중할 계획이다. “원작은 70년대 작품이다 보니 봉건적이에요. 주인공 여자친구의 임신과 결혼 등은 구태의연한 설정이어서 변화를 줬습니다. 남자친구는 가짜 마오타이주를 만들지만 여자친구는 진짜 빵을 만들어 골목시장 손수레에서 판매하는 거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아예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번안을 고민했을 법도 한데 작가 사예신의 당대 중국 사회에 대한 고뇌가 담긴 지문 등을 살리는 대신 너무 중국적인 요소를 걷어내는 정도로 각색했다. 

 

70년대 ‘빽’없는 중국 청춘의 서러움은 지금 이 땅의 금수저·흙수저 계급론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서 젊은 제자를 늘 만나고 있는 김재엽은 “한국 사회에 세대론이 많은데 사실 경제적 부분에서 우리 세대는 무기력함을 크게 느끼지 않고 성장했다. 연극하려면 가난하고 힘들게 살 것을 당연히 각오하고, 글 쓰려면 밥벌이는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삶에 두려움이나 공포는 없었는데 지금 젊은 시대는 다르다. 대학 졸업할 때 갚아야 할 빚을 산더미처럼 떠안아야 하고, 자기 앞가림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반면 어떤 친구는 해외 나가 세련된 경험을 할 기회가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친구들은 큰 상대적 박탈감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알리바이 연대기’에 나오듯 1992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2지망으로 들어간 김재엽은 학내 동아리에서 연극세계에 발을 담갔다. 이후 1999년 한국연극협회 창작극 워크숍에서 ‘아홉개의 모래시계’가 당선됐고, 200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페르소나’로 등단했다. 고(故) 박광정 연출가 권유로 극단 파크에 창단 멤버로 입단, 연극 ‘체크메이트’와 ‘개그맨과 수상’을 발표하며 연출가로 데뷔했다.

 

“대학에 들어갔더니 재능있는 문학소년·소녀가 너무 많아 ‘이쪽은 힘들겠다’ 싶어 책을 열심히 읽었어요. 학생회 선배 쫓아다니며 데모도 구경하고, 그런데 이미 그 시대에는 데모해도 시민 호응이 없더라고요. 학생운동의 비전에 대한 고민도 했는데 거리에 뛰쳐나가도 전경조차 나오지 않을 때가 있으니…. 그럴 거면 문화예술 쪽으로 무언가를 해볼 수 있지 않나 싶었죠. ‘오늘의 책’이란 서점에서 일하면서 여러 선배, 선생님 이야기 들어보니 그렇게 급하게 목표를 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는데 그 시절은 지금 하곤 달랐죠. 알바도 하고 학원 강사도 했는데 그런 삶이 그렇게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코로나 위기 시대에 여느 공연처럼 ‘만약 내가 진짜라면’도 준비 기간 내내 과연 무사히 개막할 수 있을지 가슴 졸여야 했다. 김재엽은 “두 달 넘게 준비하면서 ‘언제든 엎어질 수 있다’는 얘기를 농담으로 했다. 연극은 일단 만나야 하는 예술인데 만남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공연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아닌지 불명확한 상황에서 해야 하는 연습이 버거웠다”면서도 “그래도 모이다 보니 힘이 모이더라. 그게 에너지가 되고 지금 상황에 대해 얘기도 하면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지혜를 모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큰 타격을 입은 연극계에 필요한 지원책에 관해 묻자 “제일 큰 걱정은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업(業)이 기약 없이 중단됐다는 점”이라며 “배우들이 원래 알바하면서 버텼는데 지금은 연극도 못하고 알바도 못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창작지원, 즉 결과물을 요구하는 지원은 많은데 지금은 생존을 도울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해요. 다 어려운데 예술가들만 지원해달라고 말하긴 힘들지만 예술가들이 봉사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든다든지 무대가 회복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줘야 합니다.” 

 

김재엽은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방문교수로서 체류하며 현지 공공극장 문화를 체험하고 나선 항시 ‘극장은 토론장’이라며 극장·극단이 보다 많은 관객과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독일 극장은 연극 보는 것과 상관없이 낮부터 사람이 많아요. 밥 먹고 차 마시고, 연극 끝나면 밤늦게까지 토론하고…. 연극을 하는 이들만이 아니라 시민 모두가 공유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거죠. 반면 국내 극장은 아직 벽이 높아요. 그러다 보면 연극하는 사람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고, 연극인이 관객을 더 많이 만나 그들을 공부하고 그래서 다음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연극하는 그 얼마 안 되는 이들 안에서 인정받고 성장하는 게 인정받는 제일 빠른 길이에요. 특히 공공극장이 아티스트들을 키우는 방식에 길들다 보니 관객을 만나려는 노력이 부족합니다. 종일 연극을 하는 사람끼리만 연극 얘기를 하는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해요.” 연극 ‘만약 내가 진짜라면’,  서울 대학로 한양레퍼토리씨어터에서 5월 19일부터 29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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