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의 끝자락에 뜨끈한 곰탕 한 그릇이 생각나 전라남도 나주로 내달렸다. 나주읍성에 모인 그 많은 곰탕집들 중 가장 오래됐다는 ‘하얀집’에 들러 곰탕 갈증을 풀었다. 전북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과 견줄 만한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의 메타세쿼이아 길과 ‘한옥 깡촌’인 도래마을,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오롯한 영산포, 복합문화공간 ‘39-17 마중’ 등 여행지로서 나주의 매력을 소개한다.
◆나주 여행의 시작, 읍성과 곰탕
나주는 여행지로 어색하다. 최근 기억으론 혁신도시나 한국전력 본사 이전지로 더 선명하다. 그럼에도 나주행을 고집한 건 오로지 추운 공기에 그리워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맑은 국물의 곰탕 때문이다. 나주 여행의 시작은 곰탕인데, 막상 도착하니 곰탕집들은 죄다 읍성에 모였다. 나주곰탕과 나주읍성은 하나로 묶여 있다.

나주목(牧)의 객사인 금성관(보물 2037호)을 시작으로 잡았다. 왜 금성관일까. 함께 길을 나선 이교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이었지만 나주시가 될 때 영산포와 경쟁이 붙으면서 나영(나주+영산)시가 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금성관은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돌며 업무를 볼 때나 중앙관리들의 숙소로 쓰였다. 1480년대 이유인 목사가 망화루와 함께 지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일부 소실된 것을 목사들이 고쳐 썼고, 일제강점기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던 것이 보수를 거쳐 1976년 전부 해체돼 복원됐다. 이교숙 해설사는 “일제강점기에는 금성관이 군청사에 가려져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금성관 복원 정비사업으로 군청사를 허물고 2004∼2008년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과 서익헌을 복원했다.

나주읍성은 고려 때 축조되기 시작해 조선시대를 거치며 수차례 성벽을 확장하거나 다시 쌓았다. 원래 길이는 3.53㎞. 평지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태였다. 동쪽에 동점문, 서쪽에 영금문(서성문), 남쪽에 남고문, 북쪽에 북망문을 뒀다. 1916∼1920년 남고문이 마지막으로 철거된 후 성벽 터에 민가가 들어서거나 밭으로 경작됐다.
1993년 남고문, 2006년 동점문이 각각 복원됐다. 영금문은 2007년 제모습을 찾았고, 2018년 12월 북망문을 마지막으로 4대 정문이 모두 복원됐다. 나주 사람들은 4대문을 다 갖추고 강과 산을 낀 ‘작은 서울’이라는 의미로 ‘소경’(小京)이라고 자칭한다.


영금문에 오르니 읍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성벽이 너무 낮다. 선점숙 나주시 관광마케팅 팀장은 “성벽에서 나온 돌들을 사람들이 가져다 집을 짓고 벽을 세워서 복원이 쉽지 않았다”고 했다. 성벽 복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영금문은 1894년 동학농민군이 나주를 공격할 때 전봉준과 나주목사가 협상했던 현장이라고 적혀 있다.
영금문을 지나면 전국 최대 규모인 나주향교다. 공자 등 여러 성현에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제사를 지내는 대성전은 교육 기능의 명륜당보다 위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나주향교는 공자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가 있어 명륜당과 대성전의 자리가 바뀐 게 특징이다.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의 촬영지이고, 여러 전통체험 프로그램이 있다.


나주목사내아(금학헌)는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살림집이다. 상류 주택의 안채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읍성 안의 관아 건물 중에서 금성관과 동헌 출입문 정수루와 함께 원형을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내아가 처음 세워진 때는 알 수 없다. 안채 상량문에서 1825년(고종 29년) 7월1일 주춧돌을 놓고 7월20일 상량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수 관사로 사용하며 원형이 변형됐다가 최근 복원됐다. 이곳에서는 전통한옥 숙박체험이 가능하다. 한쪽에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 방’이라고 붙었는데, 1580년대 퇴계 이황의 학맥을 잇는 유학자이자 나주 목사로서 선정을 베푼 학봉 김성일의 정신을 기념하기 위한 방이라고 소개됐다. 이 방에서 머무르면 삶을 지혜롭게 사는 기운을 얻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고 쓰였다. 이교숙 해설사는 “내 소개로 여기서 묵은 자매가 ‘몇년 준비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며 감사 편지를 보냈다”고 웃으며 말했다.
정수루는 나주목 관아문으로 1600년대 건립됐다. 이곳을 지나면 나주목 관아(동헌)인 외동헌(제금헌)과 내동헌(금학헌)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동헌만 남았다. 정수루 주변에 목사를 보좌하는 향리들의 집무처가 즐비했다고 한다. 나주목의 지방 관원이 근무하던 건물인 주사청 터에는 노인당이 들어섰다. 1925년 창설된 노인회 이로회는 옛 주사청을 매입해 이로당이라 이름붙였다.


나주읍성을 돌다 허기가 질 때쯤 곰탕거리로 돌아왔다. 하얀집과 노안집, 한옥집 등 나주곰탕의 명성을 이어가는 곳이 여럿이다. 가격과 메뉴는 거의 같다. 맛집 블로거들의 평가를 보면 곰탕 맛이 거의 비슷하다 보니 김치와 깍두기 등 찬의 품질로 평가가 갈리기도 한다. 노안집과 한옥집은 쫄깃한 머리 고기를 내어준다는 점에서 같다. 한옥집은 곰탕만 시켜도 머리 고기를 주고, 노안집은 고기가 더 들어가 좀 더 비싼 수육곰탕을 주문해야 머리 고기를 내어준다. 소주 한 잔을 원하면 노안집이나 한옥집이 낫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줄이 가장 긴 곳은 1910년 창업자 원판례씨 이후 4대째 이어가는 하얀집이다. 2011년 길형선씨가 가업을 이었다. 길씨의 여동생이자 총괄매니저인 길재윤(59·여)씨는 “할머니 때까지 류문식당이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정수루 인근에서 장사했고, 3대 길한수씨 때 하얀집으로 이름을 바꿨다. 길재윤씨는 ‘당시와 지금의 차이가 뭐냐’는 질문에 “예전에는 연탄이 없어서 장작으로 곰탕을 끓였다”며 “당시에는 천엽 등 소 내장이 들어갔는데 입맛이 고급화하면서 빠졌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에 수만이라는 장작 파는 아저씨가 매일 가게를 오갔다고 그는 기억했다.
하얀집 홈페이지에는 나주곰탕의 유래에 대해 “일제강점기 시절,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에서 작업하고 남은 소머리 및 각종 부산물이 시장 상인 사이에서 유통되는 가운데 부산물에서 살코기를 떼어 국밥형태로 제공하던 방식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소개한다.

◆치유의 숲과 도래마을, 영산포
전라남도 산림자원연구소는 딱딱한 이름과 달리 인생 샷을 건질 포토존이 많다. 담양의 메타세쿼이아 길보다 한적한 풍경을 가졌다는 게 최대 장점이다. 여기다 향나무 숲길, 대나무 숲길 외에 어린이놀이시설, 체력단련시설, 정자, 전망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췄다. 1922년 광주 임동에 설치된 임업 묘포장을 1975년 나주로 이전했다. 1980년대 메타세쿼이아길이 조성됐고, 2008년 산림자원연구소로 이름을 바꿨다. 떫은 감, 수국, 삼나무, 감나무, 잣나무 등 수종 연구도 한창이다.
산림자원연구소 측은 “산림치유, 숲 해설 프로그램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며, 겨울에도 푸르름을 볼 수 있는 향나무 길,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갖춘 메타세쿼이아 길 등 자연환경을 갖춘 힐링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고 소개했다. 방송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뮤직비디오, CF 촬영 명소다.


산림자원연구소에서 차로 5분 거리인 도래전통한옥마을로 향했다.
도래마을은 조선 중종 때 풍산홍씨 홍한의가 조광조와 소과 동기 합격자라는 이유로 기묘사화의 화를 입을까 염려해 이곳에 낙향하면서 풍산홍씨 집성촌이 됐다고 한다. 이화 문화해설사는 “도래라는 지명은 식산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내 천’(川)자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도천’(道川)에서 도내, 도래로 변천했다고 전해진다”고 소개했다. 마을에는 그 흔한 편의점, 슈퍼가 없다. 그야말로 ‘깡촌’ 한옥마을이다. 광주 롯데백화점에서 170번 버스를 타면 도래마을이 종점이다.
우남고택에 먼저 들렀다. 옛 집주인의 호를 땄는데, ‘홍기헌 가옥민박’이라는 팻말과 ‘행복이 가득한 집 홍원석 정현미’라고 적힌 팻말이 걸렸다. 도래마을의 집들은 대개 동쪽에 있는 식산 감태봉을 등지고 서쪽의 넓은 평야를 향하고 있다. 우남고택은 초가지붕으로 된 대문채와 헛간채, 기와지붕인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됐다. 193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문간채는 맨 오른쪽 대문 외 나머지는 저장공간이다.
계은고택은 도래마을의 종가집이다. 계은고택 가옥은 안채 상량문에 ‘임진’이라고 기록돼 있어 고종 29년(1892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된 남쪽 지방 양반 주택의 전형이다.

1936년 지어진 도래마을 옛집은 공간 이용에 따라 칸살이를 자유롭게 배열하는 19세기 후반의 한옥 특징이 잘 반영된 집으로,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2호다. 2006년 10월 시민 후원과 참여로 문화유산을 발굴 보전하는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집을 매입해 보수했다. 나주 소반과 목가구, 살림살이를 갖추었고, 2009년 3월부터 숙박체험 등을 하고 있다.
1918년 지어진 홍기창가옥은 원래 규모가 큰 부농의 집으로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 여러 건물로 구성됐는데 지금은 안채만 남았다. 안채를 출입하던 중문이 대문으로 쓰인다. 양벽정은 1948년 홍씨 후손들이 도래마을에 재건한 정자로 이듬해부터 마을의 합동 세배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황포돛배와 등대가 있는 영산포 선창으로 향했다. 1972년부터 시작된 영산강 종합개발사업으로 상류에 4개 댐이 생기면서 영산강은 유량이 줄어 수로 여건이 나빠졌고, 1978년 운수기능이 중단됐다. 2008년 옛 황포돛배를 재현해 30년 만에 영산강 운항을 재개했지만 현재 코로나19 등으로 중단됐다. 황포돛배 인근 영산포 등대는 1915년 설치된 수위측정관측소인데 꼭대기에 등이 부착되면서 등대로 여겨졌다. 영산포는 2004년 시작된 홍어와 젓갈축제로 부흥기를 맞았다.

영산포 역사갤러리는 1908년 한국에 이주해 온 일본인들의 사업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이 있던 자리에 터잡았다. 역사갤러리 이재권 해설사는 “1918년 농공은행을 모체로 한 조선 식산은행이 생기면서 식산은행으로 통했다”며 “해방 후 여러 가게로 활용되다 2012년 9월 나주시가 매입해 갤러리로 조성했다”고 소개했다.

갤러리 인근의 일본인 지주저택은 일제강점기 나주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가 살던 곳이다. 1905년 영산포에 도착한 구로즈미는 1909년 영산포에서 제일가는 지주가 됐고, 1930년 나주 제일 지주가 됐다. 저택은 1935년 모든 자재를 일본에서 가져와 지었다고 한다. 해방 후 선교사가 고아원으로 운영했고, 1981년 개인이 매입해 주택으로 사용하던 것을 2009년 나주시가 매입해 보존하고 있다. 1930년대 일본의 농촌주택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나주 복암리고분전시관에는 복암리 고분군 중 3호분이 원래 크기대로 전시돼 있다. 복암리 고분에는 4기의 고분이 있다. 원래 3기 정도가 더 있었으나 소실됐다. 규모가 가장 큰 3호분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되는 옹관묘, 횡혈식석실묘, 석관옹관묘 등 7종류의 묘제와 금동신발 은제관식, 큰칼, 금 귀고리 등이 발굴됐다. 안동 권씨 문중의 선산으로 관리돼 전혀 도굴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폐교된 화진초등학교에 자리한 한국천연염색박물관은 영산강 유역을 배경으로 한 염색과 실크 문화를 알리고 있다.
복합문화공간 ‘39-17 마중’은 4000평의 근대문화유산과 야외공간으로 구성된 곳으로 포토존이 제법 많다. 나주배 양갱 만들기 체험, 나주배 비누 만들기, 나주배 한상세트 체험 등을 즐길 수 있고, 마중 의상실에서 한복이나 근대복을 빌려입고 포토존에서 기념사진을 찍거나 아예 영화 속 고택에서 하룻밤 지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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