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봉, 국사봉, 천황봉, 매봉, 사자봉. 저마다 사연 담은 깎아지른 기암괴석 봉우리와 절벽들이 병풍처럼 한 겹 두 겹 쌓인 장엄한 풍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천 길 낭떠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구름다리라니.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레 한 발 두 발 내딛는 여행자는 그대로 흑백의 점이 되어 산수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만다. 자연이 만든 위대한 영산(靈山), 달 떠오르는 월출산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이 아찔하다.
◆천황사에서 떠나보내는 만추
나이가 들수록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올라갈 땐 그럭저럭 문제없지만 하산 때 무릎에 가해지는 통증이 상상 이상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지인이 얼마 전 산에 다녀왔다며 사진 한 장 건넨다. 준험한 암봉들이 겹겹이 펼쳐진 환상적인 풍경이라니. 정말 우리나라에 이런 산이 있냐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은 “월출산!”. 만추가 떠나기 전 어서 한번 가보라며 잔뜩 바람을 넣는다. 그럴까. 며칠을 고민하다 지는 가을 아쉬워 배낭 하나 둘러메고 훌쩍 길을 나선다.
그런데 월출산 산행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해발 809m로 그리 높지 않게 느껴지지만 방심했다는 큰코다칠 수 있다. 비슷한 높이의 산들은 보통 해발 400∼500m쯤에서 등산로가 시작되지만 월출산은 거의 해발 ‘제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정상 정복까지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린다. 더구나 완만한 능선이 없고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뤄진 봉우리들이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수고는 불가피하다.
월출산으로 오르는 전남 영암군 영암읍 천황사지구 탐방로 입구에 도착하자 거대한 바위가 등산객을 맞는다. 예로부터 월출산 정기가 가장 많이 모인다는 용바위. 높이 8m, 폭 9m의 화강암으로 보기만 해도 영험한 기운이 잔뜩 느껴진다. 바위 아래 제단이 설치됐는데 매년 월출산 암영지신(巖靈之神)에게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바우제를 지낸다. 바우는 바위의 전라도 사투리. 월출산은 삼국시대에는 달이 난다는 뜻으로 월나산(月奈山)으로, 고려 때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리다 조선시대부터 월출산으로 굳어졌다.
바우제 제단 옆에는 고산 윤선도 시비가 보인다. 산중신곡(山中新曲) 중 조무요(朝霧謠)로 1659년 당쟁에 휘말려 보길도로 유배 가던 윤선도가 월출산을 보면서 읊조린 시. 월출산을 왕으로, 안개를 간신으로 비유해 간신들을 비판한 내용이 담겼다. 고산도 월출산 암봉들이 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니 오르기 전부터 설렌다.
월출산은 다양한 등산로가 있는데 월출산탐방안내소를 출발해 구름다리∼천황봉∼바람폭포를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천황지구 순환코스가 가장 사랑받는다. 등산로 입구에서 두 갈래로 나눠진다. 왼쪽 길은 천황사∼구름다리∼사자봉∼천황봉으로 연결되며 2.7㎞이고 오른쪽 길은 바람폭포를 거쳐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2㎞ 구간이다. 구름다리 쪽 길이 훨씬 힘들다. 구름다리를 지나 사자봉을 지나면 거의 하산했다 다시 등산하는 수준의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바람폭포 쪽 등산로도 쉽지 않다. 천황봉까지 계속 오르막이 이어진다.
조릿대와 벚나무들이 울창한 등산로를 350m 정도 오르면 천황사를 만난다. 4단으로 높게 쌓은 축대 위에 세운 대웅전 뒤로 우뚝 솟은 사자봉의 기세가 아주 웅장하다. 천황사 마당엔 노란 은행잎들이 수북이 쌓여 만추의 낭만으로 물들었다. 원래 이름은 ‘사자사’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얘기가 전해지며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중창했다. 고려 전기에 대각국사 의천이 찾을 정도로 번성했단다. 1597년(조선 선조 30)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 1646년(인조 24) 중창된 뒤 소규모 절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찔한 구름다리에 서니 월출산 암봉 한눈에
서둘러 떠나려는 천황사의 늦가을을 뒤로하고 노란 은행으로 덮인 계단을 오르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끊임없는 돌길과 철계단의 연속으로 서서히 허벅지가 조여오기 시작한다. 5분만 올라도 숨이 턱턱 막혀 속도가 점점 떨어진다. 산이 매우 가팔라 어차피 빨리 오를 수 없으니 기기묘묘한 암봉들과 나무 사이로 펼쳐지는 영암의 예쁜 들판을 즐기며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디딜 수밖에. 그렇게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허벅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낄 때쯤 구름다리 앞에 선다.
뾰족한 두 개의 칼날 위에 다리를 얹어놓은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하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병풍처럼 둘러선 월출산의 기암괴석 봉우리들. 너무도 장엄한 풍경에 눈은 휘둥그레지고 연신 감탄이 쏟아진다. 여기에 암벽을 울긋불긋 물들인 단풍까지 더해지니 고통스럽게 오른 수고를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는다.
매봉과 사자봉을 연결하는 월출산의 명물 구름다리는 해발 605m, 수직 120m 높이에 설치돼 우리나라 산악 지역 중 가장 높은 곳에 지은 다리. 구름다리를 건너 뒤를 돌아보면 월출산 자락이 시원하게 뻗어 나가며 영암의 들판과 환상적으로 어우러지는 풍경도 얻는다.
구름다리에서 선택이 필요하다. 계속 앞으로 나아갈지, 아니면 돌아 내려갈지. 출렁다리까지는 월출산 전체 산행의 30% 정도에 불과하고 이곳에서 사자봉을 거쳐 천황봉까지는 최고 난이도의 구간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평소에 산을 좀 많이 탄다는 이들도 굉장히 힘든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니 천황봉을 정복하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하지만 산행에 자신이 없다면 무리할 필요는 없다. 구름다리까지 올라도 설악산을 능가하는 풍경을 충분히 만끽하기에.
사자봉을 지나 통천문을 만나면 천황봉에 오르는 마지막 관문이다. 바위 사이에 만들어진 통천문은 하늘로 통하는 문이란 뜻으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 크기의 작은 굴. 통천문을 지나 천황봉 정상에 서면 월출산의 장엄한 능선과 멀리 영산강 물줄기, 영암 들판의 풍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천황봉에서 천황사 입구까지의 하산 구간인 통천문 삼거리∼광암터∼바람폭포 삼거리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린다. 광암터로 내려오는 하산 길에는 기암괴석 전시장이라 불리는 월출산의 여러 가지 바위들을 구경할 수 있으며, 특히 웅장한 육형제바위가 눈길을 끈다. 바람폭포까지 하산하는 구간마다 철계단과 바위계단이 있고 경사도 가팔라 하산 때 조심해서 천천히 이동해야 한다.
구름다리∼천황봉∼구정봉∼억새밭∼도갑사로 이어지는 종주능선도 인기 코스. 편도 9.2㎞ 거리로 약 6시간 소요된다. 오르막길이 급경사라 체력이 쉽게 소모되기 때문에 등산화는 물론, 식수를 반드시 챙겨가고 안전사고에 주의해야 한다. 천황봉에서 하산하는 구간에서는 장군바위, 남근바위, 베틀굴 등 능선을 가득 채운 기암괴석들을 감상하며 억새밭의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월출산 자락의 도갑사도 요즘 둘러보기 좋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지은 절로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 원래 이곳은 문수사라는 절이 있던 터로 도선국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인데, 도선이 중국을 다녀와서 문수사 터에 도갑사를 창건했다. 다양한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다. 1972년 국보로 지정된 월출산마애여래좌상, 도선이 디딜방아를 찧어 도술조화를 부렸다는 구정봉의 9개 우물, 박사 왕인이 일본에 건너간 것을 슬퍼한 제자들이 왕인이 공부하던 동굴입구에 새겼다는 왕인박사상 등을 만난다.
특히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도갑사 해탈문은 조선 성종 4년(1473년)에 지어진 건물로 건축양식이 독특하다. 해탈문 좌우 앞쪽 칸에 금강역사상이, 다음 칸에는 보물인 문수동자와 보현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또 대웅보전 앞과 뒤에는 오층석탑 및 삼층석탑 등 고려시대의 석탑도 세워져 있다. 만추를 즐기며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작은 불상 1000개를 만나는 천불전 왼쪽으로 놓인 오솔길은 놓치면 후회한다. 수북하게 쌓인 나뭇잎을 “사각사각” 밟으며 걸으면 늦가을 남도여행의 낭만으로 가슴이 잔뜩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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