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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성씨 이야기’] <35> 해주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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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2-08-08 00:36:49 수정 : 2012-08-08 00:3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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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공자 최충의 아버지 최온 시조…고려시대 최고의 문인 명가 해주최씨(海州崔氏)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알려진 최충(崔沖)의 아버지 최온(崔溫)을 시조로 한다. 최온은 해주에서 오랫동안 세거한 호족출신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최온의 선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최온의 초기 벼슬이 호장이었던 것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 지방 호족으로 목민관을 대신하는 경우에 호장이라는 직책을 주었는데, 최온의 첫 번째 벼슬이 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 제4대 광종(光宗) 때 태어나 현종(顯宗)과 덕종(德宗)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최온은 해주(海州)에서 목민관(牧民官)이 되고, 이후에는 판리부사(判吏部事)를 역임했다.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삼고 수양산 아래서 세거(世居)하였기 때문에 해주최씨가 되었다.

해주최씨는 고려시대에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였고,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45명을 냈다. 해주최씨의 대표적 인물은 동방 유학의 비조(鼻祖)로 추앙받고 있는 최충(崔沖)이다. 그는 문하시중을 역임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와 최초의 사학인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로 인해 최충은 ‘해동공자’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최유선(崔惟善), 최유길(崔惟吉) 형제도 뛰어난 인물로 칭송받고 있다. 또한 5대손 최윤의(崔允儀)는 예학(禮學)에 밝아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편찬하였다고 하나, 전해지진 않고 있다.

이렇듯 해주최씨는 학자나 문인들을 배출한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문인가문 중의 하나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세종 때의 학자요 청백리였던 최만리(崔萬理)가 있으며, 그밖에 시와 문장에 뛰어났던 최경창(崔慶昌),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최황(崔滉) 등이 있고,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했던 최규서(崔奎瑞)가 있다. 또한 3·1운동을 일으켰던 33인의 한 사람이었다가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崔麟)도 해주최씨 문중이다.

해주최씨는 주로 황해도에서 세거했으나, 이후에는 27개 파가 전국 각 지역에 퍼져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7개 지파에는 사정공파(司正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대녕군파(大寧君派) 서운부정공파(書雲副正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현감공각파(縣監公?派) 좌랑공파(佐郞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전한공파(典翰公派) 판사복시공파(判司僕寺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감찰공파(監察公派) 사평공파(司評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해릉군파(海陵君派) 복야공파(僕射公派) 등이 있다.

해주최씨는 2000년 국세조사에서 총 5만6592가구에 18만1840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는 전체 최씨의 8.4%를 차지하는 것이다. 물론 북한 지방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만큼 북한에도 많은 인구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는 파악할 길이 없다.

해동공자 최충과 문인(文人) 명문 해주최씨

해동공자 문헌공(文憲公) 최충의 후예를 내세우는 해주최씨는 총 인구 18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는 본관성씨 인구 순위에서 43위에 위치하는 것이며, 최씨 가운데서도 경주최씨(慶州崔氏)·전주최씨(全州崔氏)에 이어 세 번째이다.

해주최씨의 시조는 최온이며, 그의 아들이 고려의 명재상이며, 석학이었던 해동공자 최충이다. 최충 이후 해주최씨 가문은 명문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학문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구재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워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해동공자로 추앙받고 있는 문헌공 최충의 영정. 해주최씨에서는 시조 최온보다도 그의 아들인 최충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최충은 고려 성종 5년에 황해도 대령군(大寧郡·지금의 海州)에서 향리(호장)였던 최온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향리 집안 출신인 최충이 벼슬을 하게 된 것은 광종 때 시행된 과거제도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22세에 장원급제를 하고 좌습유(左拾遺)를 시발로 한림학사(翰林學士)·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역임했으며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등을 거쳐 62세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고, 9년 후인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구재학당을 세우고 83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인재를 양성했다. 그 후 구재학당을 본떠 많은 사람이 사학을 세우게 되었고, 고려시대 유학발전에 기반이 되었다.

그는 슬하에 최유선과 최유길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재상에 올라 해주최씨를 명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최유선은 형부상서(刑部上書)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문종묘정에 배향되고 문화(文和)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최유길은 호부상서(戶部上書)를 거쳐 수사공섭상서령(守司空攝尙書令)에 올랐다.

최충이 두 아들에게 내린 유훈으로 ‘계이자시(戒二子詩)’가 전해지는데, 이것이 해주최씨의 정신적 규범이 되고 있다고 한다.

“…(상략) 청렴하고 검소함을 몸에 새기고 문장으로 한 몸을 수놓아라…(중략) 문장은 비단이요 덕행은 구슬이라. 오늘 이르는 말을 뒷날 잊지 않으면, 나라의 기둥이 되어 길이 흥창하리라.” 이렇듯 해주최씨는 ‘문장’과 ‘덕행’을 중시하는 가문이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최충(崔沖)의 자손에 문행(文行)으로 재상에 오른 자가 수십 인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사 명신전에 수록된 문헌공 최충 열전.
최충의 손자인 최사추(崔思諏)는 이부상서(吏部尙書)·추밀원사(樞密院使)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숙종 8년에 고문개(高文盖)의 반란음모를 적발, 처리한 공으로 보정공신(輔正功臣)이 되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의 형 최사량(崔思諒)도 서경유수(西京留守)와 좌복야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를 역임했다.

의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최윤의(崔允儀)는 학문에도 뛰어나 ‘상정고금예문(祥定古今禮文)’을 저술했다. 이 책의 간행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최충(崔沖) 이후 무신란이 일어나기까지 100여년이 해주최씨 최전성기였다. 하지만, 무인시대가 도래하자 문장을 중시여기는 해주최씨 집안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정중부(鄭仲夫)-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최충헌(崔忠獻)으로 이어지는 20여 년간 무인정변시대는 문인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세월이었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崔瑀)시대에 와서야 무인들의 전횡을 피해 중앙을 등진 문인, 학자들을 조정에 불러들였다.

이규보(李奎報) 이인로(李仁老) 등이 바로 그들인데, 이때 해주최씨 가문에서도 최자(崔滋)가 초빙되었다. 그는 충청, 전라안찰사(按察使)를 거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한림학사(翰林學士)·승지(承旨)를 역임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른다. 그는 ‘유가집(有家集) 10권’ ‘보한집(補閑集)’ 등 저술을 남겼고, 그의 시는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그런 문인집안인 해주최씨에서 무인도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최춘명(崔椿命)이다. 그는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평안도의 자주부사(慈州府使)로 몽골장수 살리타이(撒禮塔)에 맞선다. 인근의 모든 성이 다 함락되고 끝내 고려는 몽골과 강화했으나, 그는 끝까지 성을 지켰다. 그로 인해 조정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오히려 살리타이가 나서서 ‘몽골에는 거역했지만, 고려에는 충신’이라고 하며 구명을 해서 살아났다고 한다. 그 후 1등 공신에 오르고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렀다.

조선조 해주최씨 연혁과 인물

조선조에서 해주최씨는 4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하지만, 고려 중기를 풍미했던 명문가 해주최씨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또 조선조 해주최씨의 인물로는 최만리가 있다. 그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완고한 유학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세종이 믿고 의지할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한 청백리(淸白吏)로 평가받고 있다. 

안성시 원곡면에 있는 최만리와 중화양씨 합장묘. 위에 있는 묘는 최만리의 아버지 최하의 묘이다.
최만리 외에도 조선 중기 해주최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시인이자 풍류아였던 고죽(孤竹) 최경창이 있다. 그는 기생 홍랑과의 일화로 유명한데, 홍랑이 그에게 선사했다는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라는 시조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그는 선조 때 종성부사(鍾城府史)를 지냈는데, 시인이면서도 글씨를 잘 쓰고 피리를 잘 불며 활쏘기에도 명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고죽집(孤竹集)’으로 엮어져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숙종 때에는 청백리에 녹선되기도 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충의공 최경회의 묘와 사당.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는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의 둘째 부인이다.
또 조선조의 해주최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사수하다 순국한 최경회(崔慶會)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영해군수(寧海郡守) 등을 지내다 부모의 상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능주(綾州·전남 화순)에 돌아가 있던 중, 전쟁이 터지자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錦山)·성주(星州) 등에서 왜군을 무찔러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됐고,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했다. 후에 좌찬성(左贊成)이 추증(追增)되고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촉성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論介)가 그의 둘째 부인(후실)이다.

최만리의 현손인 최황은 함경도 암행어사로 실적을 올렸으며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좌찬성을 지냈다. 그의 아들 최유원(崔有源)은 광해군 때 대사헌으로 인목대비 폐모를 극력 반대했다.

영조 때 영의정 최규서(崔奎瑞)는 최경창의 후손이다. 그는 대사간에 있을 때 장희빈을 왕비로 맞으려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대사헌·대제학과 이조판서를 거치고,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모두 역임했다. 그는 소론(少論)의 영수였다.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토평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일사부정(一絲扶鼎)이란 친필을 하사받았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고 영조묘정에 배향됐다. 문집으로 ‘간재집’이 전한다.

최운서(崔雲瑞)는 현종 때 문과·무과에 모두 급제, 충청도병마절도사를 지냈고 그의 후손들이 두각을 나타내며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연기자 최불암
해주최씨의 근현대 인물


해주최씨의 근현대 인물로는 3·1운동 33인 중 한 사람인 최린을 꼽을 수 있다. 그는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메이지법과대학에 유학할 때 조선인유학생회를 결성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귀국하여 동학에 귀의하고,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신민회에서도 활동하였다.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1933년 이후에는 대동방주의를 부르짖으며 친일로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가 되었으며, 매일신보사장을 역임하였다. 광복이 되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58년에 사망하였다.

현대인물로는 법조계와 정관계에 최명헌(전 노동부장관, 전 국회의원)·최윤모(대법관)가 있고, 학계에서는 최동(연세대 학장)·최애경(홍익대재단 이사장) 등이 있으며, 재계에서는 최수일(전 인천제철 사장), 최용주(삼양물산 회장)가 있고, 연예계에서는 탤런트 최불암씨가 있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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