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다 사랑하다…’ 펴낸 소설가 함정임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허무에 진상하듯 귀중한 포도주 몇 방울을” 바다에 따른 뒤 “그 포도주는 사라지고 물결은 취해 일렁이는도다!”라는 시를 썼다. 한국에는 ‘잃어버린 포도주’ 혹은 ‘사라진 포도주’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시편인데, 소설가 함정임(50·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은 20대 초반 이 시에 취했다.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온 그네의 청춘기 소원은 스스로 경비를 마련해 프랑스로 가는 것이었고, 결국 스물여덟살에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한달 동안 머물며 프랑스 남부 몽펠리에까지 갔고, 다시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를 썼던 세트의 묘지에 당도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명구로 기억되는 그 시편의 무대이다.
낭만적이고 풍부한 감성으로 일렁이던 이 여인은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로 등단했다. ‘문학사상’ ‘작가세계’ 같은 문예지에서 편집자로도 일했던 함정임이 누구와 만나 결혼하느냐는 당시 문단의 상당한 관심사였다. 그네의 배우자는 그네보다 1년 늦게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김소진(1963∼1997)이었다. 절집에서 내린 사주팔자 예언에 따르면 두 사람이 결혼할 경우 ‘단명’한다는 친정어머니의 지독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함정임은 김소진과 합체해 아들 태형을 낳고 ‘솔’ 출판사에 다니며 살뜰하게 살았다. 사주의 예언이 소름끼치는 대목인데, 김소진은 함정임과 1993년 결혼한 뒤 4년 동안 살다가 췌장암이 발견된 지 40여일 만에 황급히 이승을 떠났다.
지난주 화요일 오후 KTX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막차로 올라왔다. 소진이 떠난 이후 세계 각지를 노마드로 유랑하며 요리와 문화예술을 담아낸 책 ‘먹다 사랑하다 떠나다’(푸르메) 출간이 명분이었다.
그네는 “이 책은 바다에 떨어뜨린 몇 방울의 포도주가 일으킨 마법에 홀려 떠난 모험의 일종이자 그 과정에 얻은 발견의 기록”이라면서 “한 편의 시에 이끌려 소리와 색과 향과 맛의 세계에 이르는, 문학과 예술, 음식의 탐험이자 그 과정에 펼친 아름다운 향연”이라고 서문에 썼다. 맞다. 아름다운 향연이다. 그리스 에게해 물결과 부주키 선율 따라 올리브와 포도잎 쌈밥 돌마데스, 문어요리 오카포디와 밤의 산토 와인 닉테리를 소개한다. 체코, 멕시코, 쿠바에서 혀를 사로잡는 요리와 문인들의 발자취를 접하고 파리의 에스카르고에서 아를의 카마르그 흑소 등심스테이크, 옹플뢰르의 폼므칼바도스까지 섭렵한다.
부산역에 내릴 때부터 비가 내렸다. 일몰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아 사진 찍기 어려울 것 같아 서둘렀지만 함정임이 세계 각지를 향해 출발하는 청사포에 이를 때쯤에도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았고 사방이 어두워진 시각이었다. 가로등과 멀리 보이는 청사포 어선들의 불빛에다 그네가 몰고 온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까지 합쳐 비 오는 청사포 언덕길에서 사진을 찍었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했다. 겨우 건진 사진 하나, 빗물에 찡그리면서도 참고 있는 그네의 밤 얼굴이 미안하고 고맙다. 그네가 세계로 떠나기 전 늘 들른다는 바닷장어 전문 ‘수민이네 집’에 힘겹게 안착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우아하고 조용한 집이 아니라 깡통 식탁이 포진한 노천카페 같은 분위기였는데, 달맞이고개 특유의 향초 ‘방아’와 곁들여진 부드러운 바닷장어의 담백한 살맛은 좋았다. 왜 그리 떠나는 게 관행처럼 굳어졌느냐는 취지의 질문에 그네는 어느 순간 “소진이 가고, 무덤의 잔디를 살리기 위해 둘째 오빠의 도움을 받아 한여름에도 약수통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다니며 물을 주었는데, 그 오빠마저 화재로 하늘이 데려가버렸다. 어떻게 이런 공간에서 버틸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함정임은 어린 아들을 캥거루처럼 품고 틈만 나면 이 땅을 떠나 유랑했다. 정작 그 뒤로는 잡지사와 출판사의 각종 기획과 청탁에 따라 세계를 떠도는 노마드가 되었다. 유럽행 비행기를 갈아타는 카타르 공항에서도 마감을 위한 글을 쓰고 현지에 도착하면 이른 아침 그곳의 재래시장을 찾아 장을 보는 게 습관으로 굳어졌다. 그네는 소설이나 다른 어떤 글을 쓰고 난 뒤에도 가장 먼저 달려가는 곳은 잠을 보충하기 위한 침대가 아니라 시장이라고 했다. 파리든 세계 어느 곳이든 그네는 현지에 도착하면 아침에 시장으로 달려가 현지의 식재료를 사와 요리를 한다고 했다. 어쩌다 패키지로 여행을 떠나면 현지 요리사의 음식을 먹는 게 당연하겠지만 그네에게 떠남은 여행이라기보다 삶의 연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방이 사막인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서도 주변 재료를 구해 백김치를 담았다는 그네다.
부산 달맞이고개 청사포 언덕길에서 포즈를 취한 소설가 함정임. 빗물에 찡그리면서도 참고 있는 그네의 밤 얼굴이 미안하고 고맙다. |
이 대화를 작은따옴표로 처리한 건 그네의 직접 멘트가 아니라 그 발언들을 종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밤의 청사포에서 함정임과 알뜰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일일이 중계하기에는 지면이 좁다. 그네의 말을 다시 종합해 보면 이렇다.
‘어린 아들 태형을 껴안고 소진이 죽은 다음해인 1998년 파리에서 몇 개월 살았다. 파리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독일을 비롯한 각지를 다녔다. 2000년부터는 출판사나 잡지사의 청탁이 이어져 일 때문에라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가로운 여행이 아니라 일하러 떠나는 생활의 연장이었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우리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다만 떠나려는 의지와 실천의 문제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함정임은 2005년 박형섭 부산대 교수와 재혼해 결혼식 대신 아들과 함께 아일랜드 여행을 보름 남짓 다녀왔다. 그네는 청첩장 대신 그렇게 다녀오겠다고 문단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네는 지금 해운대 달맞이고개 집에서 청사포 위 ‘문탠로드’를 정원처럼, 바다는 호수처럼 거느리며 살고 있다. 그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지는 않다. 늘 유동하기에 진정한 집은 공간과 시간을 떠난 어디쯤에 있을 것 같다. 함정임은 청사포 ‘수민이네집’을 책에 이렇게 썼다.
‘그 집, 수민이네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부산으로 내려와 처음 ‘방아’라는 한국산 향초와 바닷장어구이를 맛보았던 식당이었다. 또한, 크고 작은 원고 마감을 할 때면, 마감과 동시에 기다리고 있는 일상의 업무들을 신속하고도 힘차게 수행해야 할 때면, 또 먼 곳으로 씩씩하게 여행을 떠나거나 돌아올 때면, 언덕을 달려 내려가 380년 된 수호송(守護松) 옆에 희고 담백한 바닷장어구이로 탕진해버린 에너지와 잠시 마비된 일상의 리듬을 되찾곤 하는 곳이었다.’
수민이네집을 나와도 청사포는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글·사진=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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