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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문학노트] 타인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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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5-15 20:52:48 수정 : 2015-05-15 20: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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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사회 만들려면 타인의 아픔 공감해야
문학이 주는 대리체험, 감정의 나눔 가능케 해
돈으론 결코 살 수 없어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가 또래의 무고한 생명들을 사살하고 자신 또한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갔다. 참혹하다. 육군 공보과에서 타이핑해 언론에 공개한 서울 내곡동 동원예비군훈련장 총기난사 가해자의 메모는 참담하다. 그는 “GOP때 더 죽이고 자살할 걸 기회를 놓친 게 너무 아쉬워 후회된다”고 썼다. 유서 같은 그 메모의 말미에는 “내가 죽으면 화장 말고 매장했으면 좋겠다”고 적었는데 그 이유는 “수많은 고통이 있었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화상당하였을 때”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은 아랑곳없이 생명까지 앗아간 그가 정작 자신이 겪을 고통은 죽은 후에라도 끔찍이 두려워한 것이다. 한마디로 공감능력을 상실한 고장난 정신의 작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또한 군대에 있을 때 괴롭힘을 당해 제대 후 2년이 지나도록 극단적 스트레스로 힘들어했다는 가족의 말이 맞다면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야만이 도미노로 이어진 셈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야말로 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덕목이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이 주입식 교육이나 돈벌이 기능만으로는 배양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술의 존재 이유, 특히 그중에서도 문학의 효용이 가장 빛나는 대목이 이 지점이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1933∼2003)은 ‘타인 고통’에서 독수리가 죽음을 앞둔 소녀를 뒤에서 응시하는 1994년 퓰리처상 수상 사진 ‘수단의 굶주린 소녀’를 제시하면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개입할 능력을 잃어가는가”라는 화두를 제시한다. 참혹한 사진이지만 나와 관계된 직접적인 불행이 아니면 이미지에 담긴 고통에 대해선 무관심하기 십상이다. 그래도 손택은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이라고 썼다.

사진 같은 영상이 주는 충격은 글보다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효과는 줄 수 있으나 깊이 사유하고 오래 생각에 머무르게 하는 힘은 상대적으로 덜하다. 인간들의 복잡한 심리와 그들 개개인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향연을 대리해서 체험할 수 있는 예술 장르로는 문학의 힘이 가장 세다는 데 토를 달기는 쉽지 않다. 청소년기부터 고전문학을 기본적인 교양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제도 교육 단계에서부터 철저하게 배려하는 서구의 예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왜 문학이 시민사회의 중요한 양식인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문학을 인식하는 태도를 보면 이러한 항목은 한가로운 남의 나라 일로만 여기는 것 같다.

지난달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과 한국문학번역원의 통합을 검토하는 조세재정연구원 주최 공청회에서 사회를 맡은 전직 기획재정부 장관이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문학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는 발언이 시사적이다. 문학을 ‘산업’의 관점에서 보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인 셈이다. 정부 산하 공공기관 중 ‘문학’을 타이틀로 내세운 유일한 기관이자 자본의 논리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적인 지원으로 한국문학을 해외에 번역 소개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역할을 해온 번역원을 베스트셀러 기준으로 재단하는 단순한 사고 앞에서는 망연할 따름이다. 책이라는 매개의 공통점만으로 효율을 앞세워 문학을 출판산업의 하위 분과로 우겨넣으려는 발상이라는 반대에 부닥친 배경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의 기준이 베스트셀러였던가.

단순한 산업논리로만 따진다면 왜 출판진흥원이 산업부 소관이 아니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있어야 하는지부터 되물어야 할 일이다. 대학에서마저 돈벌이와 직결되지 않는 학과부터 우선 눈앞에서 치우는 세태이니 보기에 따라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처럼 만연한 무심한 사고의 바탕이 저 끔찍한 야만의 숙주임을 새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나친 비약인가. 엊그제 일어난 비극이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피붙이의 재앙이었어도 그리 한가할까.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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