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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재앙의 씨앗, 화장발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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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8-14 22:52:11 수정 : 2015-08-14 23: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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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경제 망치는 분식회계 판치는 데 감시기능마저 고장
봐주기 감사 근절할 이중감사제 도입
통계조작 막아야
“첫 홀은 일파만파!” 아마추어 골프에서 흔히 적용하는 룰이다. 한 사람이 파(par)를 잡으면 동반자들 성적도 파로 기록한다. 첫 홀부터 잘못 쳤다고 기분 잡치지 말라는 격려의 의미다. 이후에도 캐디가 적당히 ‘분식회계’를 해준다. 양파(더블파)를 했다면 한두 타 줄여 기록하는 식이다. ‘멘붕’ 방지용 에티켓일 뿐이지만 문제가 없지 않다. 스코어카드가 ‘진실’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칠된 기록은 진짜 실력은 감추고 위장된 가짜 실력을 보여줄 뿐이다. 화장이 진할수록 도무지 맨 얼굴을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타수 좀 줄여 기록했다고 누가 큰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니 정색하고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프로의 세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스포츠는 물론이고 기업, 정부로 확장하면 분식회계는 심각한 범죄가 된다. 사회적 자본인 신뢰가 무너지고 그 기업, 그 나라엔 망조가 든다. 격려의 에티켓이 아니라 재앙의 씨앗인 것이다. 

류순열 선임기자
나라 살림이 거덜 난 그리스가 대표적이다. 이 나라의 재앙도 분식회계로 시작됐다. 2000년 6월 유럽연합(EU)에 가입하려고 통계 조작을 감행했다. 공무원들은 컴퓨터를 두드려 수치를 조작해 재정적자를 숨겼다. 관광산업과 조선업뿐인 그리스 경제는 화려하게 분칠됐다. EU 무대에서 여타 유럽 선진국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체력을 갖춘 것처럼 ‘스펙’이 재구성됐다. 2010년 그리스 통계청장은 “과거 정부가 재정적자 규모를 절반 이상 숨겼다”고 발표했다. 속임수로 성공한 EU 가입은 잘못 끼운 단추였다. 그리스는 유로화를 사용하면서 환율 조절 능력을 잃은 채 흥청망청 파티경제를 즐겼다. 결과는 국가부도였다. 뱁새가 황새 흉내를 내다가 가랑이가 찢어진 것이다.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분식회계는 이 땅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대우조선해양에서 3조원대 적자가 한꺼번에 튀어나오고 대우건설이 분식회계로 과징금 20억원을 두드려 맞으면서 ‘화장발 경제’의 민낯이 드러나고 있다. 반론의 여지는 있다. 두 회사의 분식회계 혐의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정부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에 대해 “손실을 인식하고 반영하는 시점의 문제인데, 그간의 회계 관행으로 볼 때 분식회계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 십, 몇 백억도 아니고 자그마치 3조원이다. “규모만 놓고 봐도 분식회계 개연성이 짙다”고 말하는 회계사들이 적잖다. 손실을 충분히 인식하고도 고의로 반영을 미뤘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최고경영자(CEO) 입장에서 분식회계는 악마의 유혹과 같다. 실력이 떨어질수록, 실적이 나쁠수록 유혹에 빠지기 쉽다. 결국 적자를 감추고 이익은 부풀린다. 그렇게 분칠된 성적표는 세상을 속이고 속이다 어느 날 재앙을 몰고 온다. 그러니 철저한 감시가 필요한데 그 기능은 마비 상태다. 삼일·안진·삼정·한영, 이른바 회계법인 ‘빅4’의 527개 상장사 감사의견(2014 회계연도) 중 ‘의견거절’이나 ‘부적정’은 한 건도 없다. 2010년부터 대우조선해양 감사를 맡은 안진회계법인의 감사의견도 계속 ‘적정’이었다. 오랜 시간 봐주기식 감사가 이뤄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들도 할 말은 있다. “회계사들이 수사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기업이 주는 자료를 토대로 그 안에서 감사할 수밖에 없다”(회계법인 관계자)는 것이다. “작정하고 속이는 것은 찾아낼 수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다”는 항변이다. 그러나 ‘감시기능 마비’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빅4 출신 회계사의 고백이다. “대기업 감사는 빅4가 독식하고 있는데, 그들도 굽실거려서 일거리 따오는 거다.” 을이 갑을 감사하는 꼴인데 제대로 되겠냐는 얘기다. 그는 “먹고살려면 적당히 봐주는 감사가 될 수밖에 없다”면서 “정의감 넘치는 회계사가 일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말했다.

대안이 없을까. 몇몇 선진국처럼 감사인으로 회계법인 두 곳을 지정해 서로 감시토록 하는 이중감사제는 어떤가. 투자자를 속인 CEO, 봐주기 감사를 한 회계법인을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류순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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