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익 선생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1904년 서울에서 농상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일본인 교사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이듬해 고향 파주로 돌아와 사립보통학교 통역교사로 지내다가 신민회에 가입했다. 대종교에 들어간 박 선생은 1910년 2월 만주로 망명했다. 그리고 만주에서 대종교 중심의 무장단체인 중광단에 입단했다.
1946년 5월 중경에서 남경으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이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과 박찬익 선생(작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생기면서 박 선생은 박은식, 신채호, 손정도, 조성환 등과 함께 18명의 평정관(評政官)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길림통신부에서 근무했다.
1921년 상해로 이동한 박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경기도 대표로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었다. 그해 7월에는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뽑혀 정부의 외교임무를 전담했다.
조국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임시정부의 잔무처리와 중국 내 한인교포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귀국 등 제반문제 처리를 위해 주화대표단이 창설되자 박 선생은 단장으로 임명됐다. 주화대표단은 1947년 1월 1일 한국주화대표단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1948년 8월 10일 해산됐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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