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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역사의 죄인이 되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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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14 01:21:49 수정 : 2017-04-11 16: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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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론 분열은 통일 못 이룬 업보, 후손들에게 눈물 물려줄 처지 / 당쟁과 집단 이기를 벗는 길은 100년 전처럼 우리 모두의 숙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인용 소식을 들으면서 집 가까이에 있는 파주 통일동산에 올랐다. 파주는 북한과 지척에서 대치하고 있는 변경 요새, 새하(塞下)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차점에 오두산통일전망대가 있고, 통일을 바라는 사람이나 이북실향민, 외국관광객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몇 해 전 이사를 오자마자 이곳 옛 이름을 따서 교하(交河)를 새로운 호로 쓰기 시작했다.

모처럼 찾은 통일동산은 꽃샘바람이 제법 추위를 느낄 정도로 불고 있었지만, 이미 초목이 싹을 내밀었고, 진달래도 움을 트고 봄기운이 완연했다. 산 정상에서 멀리 시야에 들어오는 한강과 임진강의 소용돌이를 바라보면서 통일의 상념에 젖어들었다. 오늘날 남북한의 역사적 현재는 조선조의 당쟁이 아니라 국가의 생존을 걸어놓고 벌이는 체제경쟁이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우리는 남북통일을 생각할 때 항상 같은 분단국 처지였던 독일통일을 전범으로 삼는다. 독일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지표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독일은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승리를 통해 프러시아에서 독일제국을 만들어냈고, 2차 세계대전 후 동서분단을 겪었지만, 오늘날 통일국가를 만들어냈다. 독일은 경제적으로는 프랑스를 앞지르는 유럽공동체의 중심국이다.

독일제국의 탄생은 쉽지 않았다.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에게 프러시아가 항복하자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자신이 머물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랑스군에 점령당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유명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하게 된다. 평소 임마누엘 칸트를 흠모한 피히테는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 시론’ 발표를 계기로 칸트의 눈에 들어 출판의 도움을 받는다. 이 글은 처음에 익명으로 발표돼 칸트의 것으로 믿어졌으나 나중에 피히테의 것으로 밝혀지자 갑자기 유명인물로 떠올랐다.

피히테는 나폴레옹 군대의 점령하에 있던 베를린학사원에서 1807년부터 1808년까지 총 14차례의 강연을 했다. 그것을 책자로 발간한 것이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다. 그 내용은 독일패망의 원인은 국민은 물론 사회지도층의 사리사욕(집단이기)과 ‘도덕적 파멸’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국민교육의 재건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교육의 목표는 정의와 덕망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은 나폴레옹에 의한 봉건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과 프러시아 중심의 통일로 외국군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는 양측으로 분열했는데 피히테는 후자에 가담했다. 민족적 자아를 우선한 선택이었다. 프랑스혁명에 의해 촉발된 자유주의적 열정을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통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독일제국이 탄생한 셈이다. 그 후 동·서독 통일도 당시 형성된 국가이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근대국가의 형성은 그 나라 국가철학의 힘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개인의 이성은 집단 이성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집단 이성은 국가 이성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피히테를 이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절대정신이 인륜의 최종단계로 국가에 이른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절대국가의 철학 전통이 아돌프 히틀러에 이르러 국가파시즘으로 변질되기도 했지만, 피히테의 철학은 독일통일을 달성하는 데는 크게 기여했다.

독일철학은 칸트에 의해 대륙 합리론의 독단주의와 영국경험론의 회의주의를 종합함으로써 소위 그의 비판주의 철학은 유럽의 정상에 오르고 헤겔에 이르러 독일관념론으로 완성되는데 그 사이 인물이 피히테이다. 피히테의 ‘주체적 자아’는 독일의 민족적 자아를 눈뜨게 하고, 헤겔의 절대정신에 이르러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보편자가 된다. 말하자면 개인은 국가가 없으면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 피히테의 국민교육정신과 같은 ‘국민교육헌장’(1968년 12월 5일)이 반포됐으나 서구사대주의 학자들의 외면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철학과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않는 우리는 지금도 근대적인 민족·국가정체성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남한은 북한보다 못한 것이다. 외국군대의 보호 속에서 진행된 자유시민정신은 결국 주체적 자아(주인정신)를 완성시키지 못하는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국가적 이념으로 체화되지 못하면 단순히 ‘잘 살기 위한 기술’ 혹은 ‘무늬만의 국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오늘날 자유(시민)민주주의와 민중민주주의가 격돌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북한의 핵개발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공조, 남한의 사드 배치와 중국의 경제보복, 그리고 대통령 탄핵이 긴밀한 상호관련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둘러싼 촛불시위와 태극기 시위의 국론분열의 모습은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한민족의 슬픔’이다. 우리는 잘못하면 후손들에게 눈물을 물려주는 처지가 됐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상처를 치유하는 평화통일사상과 국가정체성의 확립이 절실하다.

철학적으로는 남한은 식민지다. 여기에 한국인문학의 직무유기가 있다. 산업화의 성공이 저절로 자유민주주의와 통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는 헛된 꿈이다. 한반도 주변강대국은 각자의 국익을 우선하고 남북한의 통일에 협조적이지 않다. 한민족이 당쟁과 집단이기를 벗어나는 일은 100년 전처럼 여전히 민족적 숙제로 남아 있다. 통일동산을 내려오는 길은 상념의 연속이었다.

박정진 세계일보 평화연구소장·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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