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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이범진 국권수호의 상징 러시아 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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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30 21:07:12 수정 : 2017-04-11 17: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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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황제(太皇帝) 폐하, 신의 고국인 조선은 멸망하고 폐하는 갖고 있던 권세를 잃고 신은 구적에 대하여 보복할 수 없고, 또 책벌을 가할 수 없음이 심히 유감입니다. 신은 자살 외에 취할 어떠한 수단을 알지 못해 오늘 마침내 자살할 수밖에 없습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이른바 한일의정서의 체결(1904년 2월 23일) 이후 일제는 이범진(1852∼1911) 주러시아 공사의 소환을 우리나라 정부에 집요하게 요구했다. 고종은 1904년 5월 18일 “러시아 공사관을 철폐하고 이범진을 소환하라”고 지시했고, 정부는 9월 1일 이범진을 면직시켰다. 그럼에도 이범진 공사와 아들 이위종 참서관은 공사관이 철폐되는 1906년 초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나라의 멸망 소식을 듣고 1911년 1월 26일 정오에 유서를 남기고 천장에 목을 매 자결했다.

1902년 대한제국 영사관으로 쓰인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첼라 5번지 건물과 초대 영사인 이범진(작은 사진).
독립기념관 제공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영사를 설치한 것은 19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3국 주재 전권공사로 임명된 이범진은 1900년 5월 2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해 신임장을 제정받았다. 이어 같은 해 7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신임장을 제정받고 공사 업무를 개시했다. 1901년 3월 12일 겸직 공사직이 해제되고 러시아 상주공사에 임명되자,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와서 판체레이몬스카야(현재의 페스첼라)거리 5번지 건물에 공사관을 개설했다. 이 건물은 1902년 이후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1905년까지 한국공사관이 입주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초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한제국 공사관이 폐쇄됐다.

이 건물은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이 1833년부터 2년간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레닌이 1905년 혁명 후 거주하기도 했다. 푸시킨이 거주했던 시대에는 2층 건물이었던 것을 1880년대 건축가 제이제르에 의해 5층 건물로 재건축됐다. 이 건물은 현재 아파트로 사용되고 1층은 가게로 이용되고 있다. 1층 벽면에는 “이 건물에는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이범진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공사가 집무하셨습니다”라고 한글과 러시아어로 된 현판이 부착되어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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