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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조병준 독립투혼 타오른 네이멍구 배달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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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13 22:05:59 수정 : 2017-04-13 22: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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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오랍특전기 선봉향 조가걸탄 포두(包頭) 서편에는 우리 선조들이 일군 거대한 농장이 있었다. 1920년대 초 독립운동가 조병준(1862~1931)이 평북 의주 출신 민족지사들과 함께 황하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만들었다. 배달농장이라 불리던 이곳에는 배달소학교와 대종교 수광시교당이 세워졌다. 그리고 포두지역 한인들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단체로 의민부가 조직되었다. 수년 전 독립기념관이 조사에 나서기 전까지 배달농장의 위치에 관해서는 ‘포두에서 서쪽으로 120리 떨어진 중탄의 색등호로’라고만 막연하게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독립기념관은 내몽고조선족연구회 등의 도움으로 배달농장은 오랍특전기 선봉향의 서포두라는 곳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서포두 인근 조가마을에는 지금도 조병준의 동생 조병섭의 손자인 조동춘를 비롯한 삼대 여섯 식구가 살고 있다. 조동춘은 집안의 족보를 비롯해 할아버지의 유품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병준 선생 유족들은 해방 후 모두 귀국하고 자신의 부모와 삼형제만 남았다”고 말했다.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오랍특전기 포두에 있었던 배달농장 부지와 조병준(작은 사진).
조병준은 평북 의주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며 유인석의 의거에 호응하여 유학자인 장원섭, 신우현 등과 함께 평북 창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조병준은 평북 창성의 일본헌병대를 습격하며 항전했다, 그리고 의병진을 정비하여 망국의 한을 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일제의 압박을 피해 남만주로 모여드는 애국청년들의 수가 수만명에 달하자 이들을 규합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대한독립단이 만들어지자 조병준은 총참모에 선임됐다. 1920년 2월 항일전선의 통일을 절감한 대한의용군사협회, 한족회, 민국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등이 통합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대한광복군으로 개편했다. 조병준은 일제가 머지않아 만주 침략의 계획을 실현할 것을 예견하고 동지 신우현, 김승학, 백기준 등 10여 가호 80여명을 인솔해 네이멍구 수원성 포두현 중탄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황무지 60여만평을 15년 기한으로 임차하고 이를 개간했다. 한인촌을 건설한 조병준 일행은 이곳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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