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영어강박증 내려놓기

관련이슈 기자가 만난 세상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2017-05-01 01:29:25 수정 : 2017-05-01 01:29:24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남산…여기 쪽 가다…맞아요?”

날이 따뜻하게 풀리기 시작한 지난 주말 오전. 한 외국인 관광객의 어설픈 한국어에 이어폰을 빼고 가던 길을 멈췄다. 지도를 들고 남산 가는 길을 묻던 그는 한눈에 영어권 사람임을 알 수 있었지만 애써 한국어를 고집했다. 그 정성에 나 역시 쉬운 한국어와 몸짓으로 느릿느릿 방향을 가르쳐 줬다. 영어로 답할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연습해 온 한국어로 현지 사람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의 의지가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내 환한 웃음과 함께 사라지던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스쳤다. 몇년 전 유럽여행 때 내 모습과 너무나 대비돼서다. 당시의 나는 비영어권이 잔뜩 포함된 유럽 10여개국을 돌면서도 현지어 한 번 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세계공용어’인 영어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영어로 답을 듣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정지혜 산업부 기자
내가 경험했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비영어권의 많은 유럽인들은 외국인의 영어에 번번이 자기 나라 말로 답하는 것이었다. 꽤나 어색하고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외국인만 보면 우리가 먼저 영어를 써주고 마는 ‘영어공화국’ 한국의 풍경과 너무 달랐기에 강한 인상을 남겼달까. 이는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가 “한국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만나는 사람마다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라고 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한국에 살려면 영어를 익혀야 했기에 다른 한국 학생들처럼 영어 동아리에 가입하고 원어민 친구를 사귀었고 영어 자격시험도 준비했다”고 웃지 못할 고백을 했다.

여하튼 당시 영어만 고집하는 나를 향해 유럽 사람들은 눈 한번 깜빡 않고 현란한 자국어 퍼레이드로 쏘아붙이곤 했다. 길을 잃었을 때, 기차를 놓쳤을 때, 숙소에 문제가 생겼을 때 모두 그랬다. 하는 수 없이 스스로 해결하거나 영어 구사자를 찾을 때까지 헤맸던 기억이 난다.

그땐 좀 힘들었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영어 사용이 법적으로 강제된 것도 아니고 그들이 당연히 영어를 써줘야 할 이유는 없다. 타국에 가면서 현지 언어와 문화를 모른다면 그에 따른 불편함도 자신의 몫이다. ‘마땅히 영어를 써야 한다’는 요구는 당위성을 갖기는커녕 오만에 가깝다. 그러니 자국어를 고집하는 유럽인들에 대해 ‘답답하고 무지하다’는 불만까지 안고 돌아왔던 나 자신에게도 뒤늦게 부끄러움이 생겼던 것이다.

‘영어만능주의’ 사회에서 길러진 탓일까. 평생 영어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영어를 못 써서 안달’인 우리의 자화상이라니. 영어를 잘해서 결코 흠 될 것은 없지만 그러는 동안 정작 아름다운 우리말의 중요성을 홀대하게 된 건 아닌지, 여행지에서는 현지 언어와 문화를 수용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게 아닌지 돌아보게 됐다. 게다가 한국어와는 어순도, 문화권도 완전히 다른 영어를 우리 모두가 잘하는 건 애초에 무리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올해부터 수능 영어 절대평가도 도입된다. 그동안 한국인을 괴롭혀 온 영어강박증을 조금은 내려놓을 때다.

정지혜 산업부 기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