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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관동별곡’과 함께하는 강원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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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27 22:27:54 수정 : 2017-07-27 22:2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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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년전 강원도 풍광 파노라마처럼 전개 / 왕에 대한 충성과 민생문제 해결 늘 다짐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됐다. 산과 바다가 절경을 이루는 강원도 지역은 무더위를 피하는 대표적인 여행지로 손꼽힌다. 최근에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서울과 양양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이곳을 찾는 발길이 더욱 많아졌다.

강원도에 대한 정취를 더욱 풍부하게 해 주는 글이 조선 중기의 학자 정철(鄭澈·1536~1593)이 쓴 ‘관동별곡(關東別曲)’이다. 누구나가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학습했던 그 글에는 437년 전 강원도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536년 현재의 서울 청운초등학교 인근에서 태어난 정철은 45세가 되던 1580년 1월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당시 상황을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영추문으로 들어와 경회루 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절(玉節·관찰사의 행차를 알리는 표신)이 앞에 섰다”고 표현하고 있다.

정철은 문학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본격화되던 시기 서인의 강경파로 활약한 대표적인 정치인이기도 하다. 강원도관찰사로 가게 된 것도 당쟁의 와중에서 동인의 탄핵을 받아 중앙의 관직에 있기는 어려워 지방의 관찰사로 나가게 된 것이다. 정철의 여정은 섬강과 치악을 거쳐 통천의 총석정에서 시작해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및 삼척 죽서루와 현재는 경상도에 속하는 울진의 망양정, 평해 월송정에 이르는 8경이 중심을 이룬다.

정철은 관찰사 부임을 계기로 관동의 명승지를 찾아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한편 지역 민심을 제대로 파악해 중앙 정치에 복귀했을 때 어떤 정치를 해야 할 것인가의 구상까지 담았다. ‘관동별곡’ 곳곳에 명승지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자신의 느낌까지 피력한 것도 이러한 의지가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강릉에 대해서는 “강릉 대도호부 풍속이 좋을시고/절효정문(節孝旌門)이 고을마다 서 있으니”라고 하여 이곳이 효자와 열녀의 고향임을 언급했다. 금강산의 원통골과 화룡소 일대를 답사한 여정에서 “원통골 가는 길로 사자봉(獅子峰)을 찾아가니/그 앞에 넓은 바위 화룡소 되었구나/천년 노룡(老龍)이 굽이굽이 서려있어/주야로 흘러내어 창해(滄海)에 이어지니/풍운(風雲)을 언제 얻어 삼일우(三日雨)를 내리려느냐?/음지에 시든 풀을 다 살려 내리라”고 한 표현이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술 가져다가 사해에 고루 나눠 억만 창생(蒼生)을 다 취케 만든 후에 그제야 고쳐 만나 또 한잔 하자꾸나”에서도 백성의 삶을 걱정하고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작자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관동별곡’에서 정철은 주요 명승지 외에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았고, 왕에 대한 충성과 민생 문제 해결을 늘 다짐했다.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도내의 병폐를 진달하였는데, 왕이 가상히 여겨 답하고 해당 관사에 내려 의논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는 ‘선조수정실록’ 1580년 7월의 기록에서도 정철의 강원도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 그 문제점을 해결하려 한 목적이 컸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올여름 관동 지역을 찾을 때는 관동별곡의 기록과 함께하는 것은 어떨까. 수려한 자연 풍광과 함께 인문학의 향기에 젖어들 수 있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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