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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유득공과 ‘이십일도 회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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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9-07 21:04:53 수정 : 2017-09-07 21: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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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옛 도읍지들 유람후 감회 읊어
실학 면모 잘 나타나… 청나라에까지 명성
최근 역사 유적지를 찾아가는 답사 여행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방송에서도 주요 지역을 찾아 유적지를 살펴보고 그곳에 얽힌 역사와 인물, 주변 맛집까지 찾아 인문학의 즐거움과 의미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답사 여행의 선구쯤 되는 인물로 조선후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9~1807)을 꼽을 수 있다. 유득공은 풍부한 독서력과 역사에 대한 식견을 바탕으로 발해를 우리 역사에 처음 편입시킨 ‘발해고’를 저술하고, 19세기 한양의 풍속을 정리한 ‘경도잡지’를 펴낸 학자이다. 그는 정조 시대에 박제가, 이덕무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하면서 정조 시대 각종 서적의 출판 사업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자질을 알아본 정조는 그에게 많은 책을 하사했고, 유득공은 정조의 후원을 기억하기 위해 왕이 하사한 책을 보관한 서재인 ‘사서루(賜書樓)’를 마련하기도 했다.

유득공의 저술 중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고 이에 대한 감상을 담은 ‘이십일도 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다. 이 작품은 1773년에 박지원, 이덕무와 함께 역사 속 옛 도읍지인 성과 평양을 유람하고 이어 공주 등지를 다녀오면서 쓴 기록이다. 칠언절구로 된 43수의 시로 구성됐는데, 단군의 왕검성에서 시작해 고려의 송도까지, 우리 역사 속 21개 도읍지의 역사와 함께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1792년에 쓴 저자의 서문을 보면, “회상해 보니, 무술년(1778년) 무렵 종현(지금의 명동성당 부근) 부근 산턱에 우거하고 있었다. 낡은 집 세 칸에 붓과 벼루, 칼과 자가 뒤섞여 있었는데, 이런 것이 싫증나서 자그만 채마 밭에 자주 앉아 있게 되었다. (…) 때때로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열람하면서 한 수의 시를 얻으면 여러 날을 고심하며 읊조리게 되니, 어린 아들과 계집아이 종이 모두 이를 듣고 외울 정도였다고 기록해 당시 유득공의 작품이 널리 펴졌음을 알 수가 있다.

저술이 완성된 직후인 1778년 3월에는 박제가와 이덕무가 연경에 가서 반정균, 완원과 같은 청나라의 학자들에게 이 책을 소개해 청나라에까지 그의 명성이 알려졌다. 이 시는 우리 역사의 시작인 단군조선의 왕검성 1수, 기자조선의 평양 2수, 위만조선의 평양 2수, 한(韓)의 금마 1수, 예(濊)의 강릉 1수, 맥(貊)의 춘천 1수, 고구려의 평양 5수, 보덕(報德)의 금마저 1수, 비류의 성천(成川) 1수, 백제의 부여 4수, 미추홀의 인천 1수, 신라의 경주 6수, 명주의 강릉 1수, 금관가야의 김해 1수, 대가야의 고령 1수, 감문(甘文)의 개령 1수, 우산의 울릉도 1수, 탐라의 제주 1수, 후백제의 완산 1수, 태봉의 철원 1수, 고려의 개성 9수 등으로 구성돼 있다.

유적지에 대한 감회를 읊는 가운데 망국에 대한 비평 의식을 나타내고 역사의 무상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서술했다. 실증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원류를 찾으려 한 유득공의 치열한 역사의식이 시로 표현된 저술로,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풍미했던 조선후기 실학의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이제 바람도 선선해 독서와 여행이 딱 어울리는 좋은 계절이다. 선인들의 책을 잡고, 역사와 문화를 찾는 답사 여행에 나서 보는 것은 어떨까?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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