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나서는 북·미회동이 전격 추진됐으나 북측이 틀어 무산된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다음날인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합의됐으나 북측은 2시간 전에 갑자기 회동을 취소했다. 회동 계획은 청와대의 적극 중재로 북한이 대화 참여 의사를 밝히고 미국이 이에 응하기로 결정하면서 만들어졌다. 회동이 성사됐다면 살얼음판 같은 한반도 위기지수를 낮출 호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북한은 그 귀중한 기회를 제 발로 차버렸다.
펜스 부통령이 대북제재를 위한 한·미·일 동맹관계를 과시하고 북한의 인권문제를 거론하자 북한이 반발한 것이 회동 무산의 원인이라고 한다. 미국 부통령실의 닉 에이어스 비서실장의 설명이 그렇다. 펜스 부통령은 회동 일정 하루 전인 9일 평택의 해군 2함대 사령부를 방문해 탈북자들과 면담한 자리에서 북한을 “자국 시민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굶주리게 하는 정권”이라고 비판했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찬에선 “미국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압박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노동신문은 10일자 논평에서 “존엄 높은 우리 정권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악설로 거리낌 없이 모독하는 광대극까지 벌려 놓았다”고 했다. 심기가 불편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나 북한의 회동 취소는 어리석은 결정이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핵·탄도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강도 높은 제재와 압박을 가하고 있고 군사적 공격 가능성까지 검토하고 있다. 북한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고 여긴다면 큰 착각이다. 북한이 쥔 것은 언제 자신의 가슴을 겨누게 될지 모를 칼날일 뿐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지난 8일 열병식에서 “침략자들이 신성한 우리 조국의 존엄과 자주권을 0.001㎜도 침해하거나 희롱하려 들지 못하게 하여야 하겠다”고 했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으면서도 주민 의식을 마비시키는 말잔치나 벌이니 답답한 노릇이다.
북한은 냉엄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비핵화를 전제로 북·미대화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 한 동북아 지정학에 봄바람이 스며들 여지는 없다.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의 방북 제안에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 나가자”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고, 남북정상회담 문제를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판단 때문이다. 핵을 쥔 채 남북대화 시늉을 하면서 한편으로 미국과의 대화 문제로 줄다리기를 벌여봐야 헛일이다. 더 늦기 전에 핵과 미사일을 내려놓고 대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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