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맞은 ‘국민 MC’ 송해/전국노래자랑은 ‘내 운명’/불안정한 ‘딴따라 삶’에 숱한 좌절/환갑부터 진행… 이름 제대로 알려/
30년간 같이 일한 연출가만 300명 새해, 누구를 인터뷰할까 고민했다. 기해년 한 해도 힘차게 살아낼 덕담을 해줄 원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살아온 역정이 두루 존경을 받을 만한 데다 많은 이들이 바라는 ‘행복’ ‘건강’ ‘장수’와 같은 단어들과 어울리는 분이면 괜찮을 듯했다. 그래서 떠올린 이가 방송인 송해(92)다. 아시아 최고령 MC라고도 한다. 30년 넘게 매주 일요일 KBS 1TV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고 있다. 더욱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나이에 일할 수 있고 돈까지 버니 자식들에게는 최고의 아버지, 최고의 할아버지”라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대중예술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지만 ‘눈물 반 노래 반’이라는 그의 삶과 장수 건강법, 인생 팁을 직접 듣고 싶어 연초에 그를 찾았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낙원동 원로연예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상록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그가 연말 감기에 걸려 몇 차례 조정 끝에 어렵게 성사됐다. 허스키하면서도 힘이 있는 톤으로 1시간 30분 동안 친절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건강부터 물었다. “연말에 행사가 많아서 과로한 것 같아요. 이놈의 기침감기 때문에 열흘 넘게 좋아하는 술도 한 잔 못했어요. 그래도 고마운 것은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이 걱정을 해줬어요. 이젠 약 먹고 좋아졌어요. 전국노래자랑 홍천군편 녹화도 잘 다녀왔어요.”
그는 애주가로 유명하다. 공연 뒤풀이 자리서 혼자서 소주 20병 넘게 비웠다거나, 술자리는 5∼7차까지 갔다는 그와 얽힌 연예계 뒷얘기도 많다. 그와 친한 이용식 설운도 엄용수 등 연예계 후배는 그와 술자리에서 주량을 감당하지 못해 줄행랑을 쳤다는 소문도 있다. 젊은 시절 술에 관한 한 자존심(?)이 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요즘도 약주를 그렇게 많이 하는지 궁금했다. “예전처럼 그렇게는 마시지 않지만, 여전히 좋아합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마셔요. 한자리에서 두 병은 기본입니다. 소주만 마셔요. 맥주나 막걸리 등 다른 주종은 몸에 맞질 않아요. 가끔 젊은 친구들이 아직도 많이 마시는 줄 알고 공격(?)을 해와 곤혹스러울 때가 있지만, 이제는 철저히 자제를 합니다. 어느 정도 마시다 ‘내가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바로 술잔을 놓습니다. 선을 넘지 않아요.”
그와 인터뷰한다고 하자 건강법을 물어보라는 이가 꽤 많았다. 인터뷰해 보니 생활 자체가 운동이 습관화돼 있다. 잘나가는 정상급 연예인이면서도 매니저도 승용차도 없다. 많이 알려졌지만 그의 건강비결은 ‘BMW’에 있다. Bus(버스)+Metro(지하철)+Walk(걷기)를 말한다. 전국노래자랑 녹화가 없는 날에는 강남구 도곡동 집에서 3호선을 타고 상록회 사무실까지 출퇴근한다.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시민들과 얘기하며 걷는 것이 즐거움이 된 지 오래다. 그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우나다. 상록회 사무실을 찾는 날에는 꼭 사우나탕을 찾는다. 근처에 ‘송해 사우나’가 있다. 원래는 에메랄드목욕탕이었으나 목욕탕 주인이 몇 년 전 그를 위해 송해사우나로 아예 간판을 바꿨다. 녹화차 지방을 갈 때도 공중목욕탕은 꼭 들른다. 냉온탕을 번갈아 들락거리면 온몸이 개운하다. 건강 비결을 하나 더 꼽자면 규칙적인 잠자리다. 저녁 9시 뉴스만 보고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난다. 정해진 시간에 사무실에 나타나 ‘낙원동 칸트’라고도 불린다.
그는 휴대전화가 없다. 그와 연락을 하려면 상록회 사무실 ‘조실장’을 통해야 한다. 그것도 이유가 있다. “전화가 없으니 전화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어요. 그 많은 전화 제가 다 받는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스트레스겠어요. 상대방은 답답할 수도 있으나 나는 불편함이 없어요.”
음식도 가리지 않는다. 사무실 근처 한 끼 2000원 하는 시래기 국밥과 4000원짜리 백반을 즐겨 먹는다. 인터뷰한 다음날인 8일 그가 민생탐방차 낙원동을 찾은 이낙연 총리와 같이한 점심 메뉴도 시래기 국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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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송해는 인터뷰에서 “돌이켜보면 대접받지 못한 ‘딴따라’의 삶이었으나 매 순간 낮은 자세로 최선을 다했더니 좋아해 주시는 분이 많아 이 나이에도 외롭지 않게 됐다”며 “남북한 관계가 개선되는 만큼 더 늦기 전에 평양 무대에서 마이크를 다시 한 번 잡아보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
송해라는 이름을 제대로 알리게 된 것은 전국노래자랑 MC를 맡은 환갑부터다. 젊은 시절엔 빛을 보지 못해 불안정한 삶의 연속이었다. “1980년대 이전만 해도 우리 계통은 ‘딴따라’라고 해서 대접을 받지 못했지요. 방송을 하면서도 3년 계획을 못 세웠어요. 춘하추동 프로그램이 개편돼 잘리기를 밥먹듯이 했어요. 좌절감으로 술로 날밤을 새우며 ‘타락’도 했어요. 그래도 삶의 끈을 놓을 순 없어 이를 악물고 살아왔어요. 한 가지만 하면 밥을 못 먹겠다 싶어 노래도 하고 코미디도 악극도 했어요. 지금은 웃지만 돌이켜보면 눈물 많았던 격동의 세월을 용케도 넘어왔어요.”
그는 노년복이 있다. 낙원동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대구 달성군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있다. 지방 녹화 때마다 수백, 수천 명의 팬이 달려와 악수와 사인을 요청하며 그에게 ‘오래 사시라’고 한다. 인기 비결에 대해 물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어요. 어디를 가도 내가 제일 나이가 많지만, 항상 나이를 내려놓습니다. 전국노래자랑 30년을 해오면서 연출가를 300명 이상 겪었어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달라요. 내가 오래했지만 내 생각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들에게 맞추고 양보도 해요. 아들뻘 손자뻘이지만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요. 녹화가 끝나면 꼭 뒤풀이하면서 소통을 합니다. 술은 그때 필요해서 마셔요. 전국노래자랑은 진행자 역할이 중요해요. 출연자는 방송을 처음해 긴장을 많이 합니다. 무대에 서면 앞이 캄캄해져요. 내가 편안하게 해줘야 노래도 재주도 나옵니다. 사전에 출연자하고 만나 대화를 하며 편안하게 달래주죠. 사회자의 사명은 죽은 나무에서라도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이다. 그는 1987년 외아들을 한남대교에서 교통사고로 잃었다. 지금도 한남대교 쪽으로 가지 못한다. 주변에서 아들 얘기는 금기시한다. 20여년간 전국노래자랑 무대를 같이했던 김인협 악단장이 2012년 폐암으로 숨졌을 때도 그의 충격이 작지 않았다. 14살 아래지만 마음을 터놓으며 지낸 특별한 친구였다. 인터뷰 도중에 “그 친구와 전국을 돌며 마신 술만 몇 t이 될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해 1월에는 부인 석옥이 여사를 먼저 보냈다. “아내가 없으니 불편하고 그 외로움이 헤아릴 수가 없어요. 겪어 보지 않으니 모르잖아요. 아내한테 잘하세요.”
얼마를 살아야 욕심이 없어질까. 구순을 넘었으니 마음이 비워질까. 그래서 지금도 욕심이 있느냐고 도발적인 질문을 했다. “욕심 없는 삶은 없는 것 같아요. 대구 달성군에 가면 100세교가 있어요. 이곳에는 대게 부모와 아들딸이 같이 옵니다. 한 노인이 주변을 둘러본 뒤 ‘100세교라는데 한 번 더 밟고 가자’며 자식들을 이끌더라고요(웃음). 제 경우엔 고희를 넘기면서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났어요. 후배들을 봐도 도와주고 싶어 어려운 것 없는지 묻게 되더라고요.”
그에겐 모두가 마지막 소망이 있다. 떠나온 북한 고향인 황해도 재령에 가보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정부 때 북한을 두 번 다녀왔으나 정작 고향은 가보지 못했다. “지난해 남북한 정상이 세 차례 만났고 예술단 교류도 했으니 머지않아 방문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2003년 평양노래자랑 공연에 갔을 때는 살아계실지도 모를 누님 생각해서 옷 한 벌 해 갔는데 누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그 옷은 결국 호텔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줬어요. 이젠 고향을 가더라도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꼭 한번 가고 싶어요. 평양노래자랑을 함께 진행한 북한 전성희 아나운서 소식도 궁금합니다.” 그가 떠나는 날 전 아나운서가 “아바지, 고저 건강하시라요” 하며 손을 잡았다고 한다. 다시 한번 그와 무대에도 서고 싶다고 했다.
그의 노래 중에는 ‘내 인생은 딩동댕’이 있다. 김정호 작곡가가 그의 구순 때 헌정된 곡이다. 기자에게 가만히 들어보라며 직접 불렀다. “산도 넘고 강도 건너/ 나 여기 서있네/ 눈도 맞고 비도 맞고/ 앞만 보고 달려왔었네/ 지나온 길 생각하면/ 아쉬움이 너무 많은데/ 좋은 친구 좋은 이웃/ 내 곁에 함께 있으니/ 괜찮아 이만하면 괜찮아/내 인생 딩동댕이야….” 눈물 반 노래 반이라는 그의 ‘딴따라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30년 넘게 국민과 함께 울고 웃으며 2003년 보관문화훈장에 이어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금관문화훈장이 고인이 된 예술인에게 주는 관례에 비춰 보면 대중문화의 상징 인물로 각인돼 있다. 요즘 그는 대구 송해공원에 건립되는 가칭 ‘송해코미디박물관’에 보낼 음반과 책 등 소장품을 분류하느라 바쁘다. 2016년 옥연지 일대에 건립된 송해공원은 연간 75만여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달성군이 송해효과를 톡톡히 보는 셈이다. “세월이 60대는 60㎞, 70대는 70㎞, 80대는 80㎞, 90대는 90㎞로 간다고 하잖아요. 90년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렸어요(허허). 하루하루가 금쪽같아요. 다들 양보하고 웃으며 사세요. 싸울 일이 있어도 피하세요. 그렇게 살다 보면 여러분의 인생은 ‘딩동댕’입니다.” 인터뷰를 끝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를 향해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하트를 그려 보였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송해는… ●1927년 4월27일 황해도 재령 출생 ●1950년 황해도 해주 음악전문학교 졸업 ●1954년 창공악극단 가수 데뷔 ●1962년 고 박시명과 콤비로 동아방송 퀴즈 프로그램 ‘스무고개’로 방송 데뷔 ●1965년 KBS ‘광일쇼’로 TV무대 진출 ●1987년 KBS코미디 연기대상 특별상 ●1999년 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2003년 북한 방문 ‘특별기획 평양노래자랑’ 진행, 보관문화훈장 수상 ●2015년 은관문화훈장 수상, 대구 달성군 옥포면 ‘송해 공원’ 조성 ●KBS 1TV 전국노래자랑 MC(1988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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