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꽃 대궐, 그 안에 살았던 김종영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어느새 계절은 봄의 한가운데 와 있다. 유독 꽃샘추위가 심했던 해이지만 봄꽃들은 때에 맞춰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며 동요 ‘고향의 봄’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 가사를 흥얼거리다 보면 조각가 우성(又誠) 김종영(1915~1982)이 떠오른다. 가사 속에서 “꽃 대궐”로 묘사한 곳이 김종영의 고향 집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종영의 고향 집은 경남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에 있다. 등록문화재 제200호다. 구조와 각부 장식에서 근대 한옥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서원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한 솟을대문이 있어 근대기 상류층의 건축 경향을 보여준다. ‘고향의 봄’ 가사를 쓴 이원수는 어린 시절 근처에 살며 이 집을 자주 지나쳤다고 한다.
#조각적 소묘 그리던 청년이 만든 조각세계
김종영은 한국 현대 추상 조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조각가다. 그는 1915년 영남 사대부 가문의 김기호와 이정실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벼슬에 올랐던 선대와 달리 선비의 삶을 살았던 아버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웠고 이는 자연스럽게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김종영은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당대 몇 안 되는 서양화가이자 미술교육자였던 우석(雨石) 장발(1901∼2001)을 은사로 만난다.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서 일등상을 받는 등 남다른 예술적 소질을 보인 김종영을 작가의 길로 인도해 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장발은 김종영의 소묘를 보며 조각적이란 말을 하곤 했다. 검은 선으로만 그리는데도 대상의 입체감을 포착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장발은 그가 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일본 도쿄미술학교 조각부 입학을 권유했다. 김종영은 조각이 동양미술과 서양미술의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장르라 생각해 1936년 도쿄미술학교 조각부에 입학했다. 학교로 떠나는 청년의 마음에는 설렘이 가득했을 것이다. 서양미술 중에서도 특히 추상 조각이 미술 전반의 흐름에서 획기적인 이정표가 되는 시기였다.
수업 내용은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인체 조각이 수업의 주를 이뤘고 표현 방법에서도 일본 조각의 기술적 감화를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일본 전통 목조 기법인 나타보리 기법 등은 당시 한국 학생들의 작품에서 쉬이 볼 수 있다.
김종영은 교실 밖으로 나갔다. 수업이 끝나면 서점에 가서 화집을 통해 에밀 앙투안 부르델과 아리스티드 마이욜, 콘스탄틴 브랑쿠시 같은 서구 현대 조각가들의 작품을 만났다. 단순화한 형태 속에 사물의 본질, 운동성을 담아내는 그들의 작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학교 실기실이나 집에서 곧잘 그 작품들을 따라 해보고는 했다. 수업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단순성을 살리는 작품을 홀로 깨닫고 익힌 것이다. 이때의 배움은 그가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만들고 자리 잡는 데 큰 밑바탕이 됐다. 해방 이후 왜색을 벗어나지 못해 고생한 몇몇 유학생 출신 조각가들이 있었으나 그는 자유로웠다.
1941년 귀국한 그는 7년 뒤 서울대 조소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 뒤 정년까지 32년의 세월을 학교에서 보내며 조각가를 키워냈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한 김세중을 비롯해 최종태, 윤명로, 심문섭 등이 그의 제자다. 우리 현대 조각의 역사에서 그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또한 그는 1953년 영국 런던 테이트갤러리에서 주최한 ‘무명정치수를 위한 국제공모전’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했다. 영국의 미술사가이자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가 주관하고 조각가 헨리 무어가 심사위원장을 맡은 행사였다. 이는 국내 작가 중 최초로 해외 공모전에서 수상한 쾌거로 기록되고 있다.
#단순화한 형태 속에 담아낸 자연을 향한 향수
교육자로서, 작가로서 김종영은 1950년대 한국 조각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59년이 되어서야 서울 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동양화가 월전 장우성과 함께 2인전으로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작품활동에만 전념해 왔기 때문이다.
사진을 통해 당시 전시 모습을 보면 장우성의 작품이 벽에 걸려 있고 김종영의 작품은 전시장 중앙에 늘어놓은 좌대 위에 올려진 흔한 모습이다. 그 흔함 때문이었을까. 한 미술비평가는 이 전시를 보고 김종영의 조각이 ‘백화점 나열식’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외국에서 상을 받았다는 작가의 작품에 기대했을 남다름이 없자 실망한 것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김종영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배경을 알 기회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김종영은 지천명, 50세에 접어든 해에 놀라운 발언을 한다. 지난 30여년간 제작한 작품들이 실험과정에 있었다고 한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임서(臨書)를 하며 서예를 배웠듯 작품도 익혔다. 학창 시절 화집 속 서구 조각가의 작품을 흉내내 만들어 봤다는 일화도 일맥상통한다. 2인전에서의 작품은 여전히 조각의 형태를 충실히 익히며 그것의 정취를 터득하는 중이었다.
그는 이 발언 이후 본격적으로 자기 작품세계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서양미술에 대한 체득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적 정서와 감성을 담은 조각을 만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적 정서와 감성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알맞은 행위를 해야 한다는 지재불후(志在不朽)에 있다.
김종영은 ‘불각도인’(不刻道人)이란 말을 작품 한쪽에 새기곤 했다. 조각가임에도 자신을 깎지 않는 사람이라고 부른 것이 인상 깊다. 자연과 사물의 본성을 최대한 살리는 조형 방법을 탐구하는 데 가치를 뒀던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로서의 원숙기에 도달한 시기로 일컬어지는 1979년 ‘작품 79-12’와 1981년 ‘작품 81-4’를 보면 이러한 시도가 오롯이 드러난다. 두 작품은 분명 서구의 미니멀 조각의 형태와 닮아 있다. 하지만 완벽한 직선과 구조를 추구했던 그것과는 어쩐지 느낌이 다르다. 전체적인 균형이 흠잡을 데가 없는데도 선은 마음대로 굽이지고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장면도 없기 때문이다.
작품들은 이렇게 유연한 흐름으로 엮여 있기에 나무나 돌이란 재료로 멈춰 있지 않다.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숨을 쉬며 우리 앞에 실재한다. 그래서 그 앞에 서면 눈을 떼지 못하고 그것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김종영은 197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과 후학 양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1980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다. 예술 생애를 총괄하는 대규모 전시였다. 이 전시를 기념하며 문예원에서는 그간의 대표작을 모은 최초의 작품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1982년 암 투병 중 67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일상을 바쁘게 보내다 보면 김종영의 작품은 문득문득 생각난다. 정확하게는 그것의 숨소리와 전하던 이야기가 들려온다. 자연을 향한 깊이 있는 향수를 마음에 품고 사는 동양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문명에 찌든 현대인으로서 그것이 더 절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종영의 작품을 생각하면 꼭 그의 고향 집 때문이 아니더라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 ‘고향의 봄’이 입에서 흘러나온다.
김종영에 대한 연구는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김종영미술관에서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본관 불각재에서는 김종영 상설 특별전이 있고 신관 사미루에서는 기획전이 열리곤 한다. 평창동으로 향하는 봄날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이 봄, 김종영의 작품들을 마음에 담은 채 그곳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그 길을 걸으며 꽃과 나무, 산과 호흡하며 나의 본질을 되돌아보자. 자연과 사물의 본성에 대한 고찰, 그가 세상을 표현하려 했던 방식을 빌려서 말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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