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 검증팀 안일한 일처리 화 자초
文대통령 ‘투기와 전쟁’ 무색해져
‘적폐’와 ‘동지’ 평가잣대 정상화 시급
“실패한 투기였습니다.”
김대중정부 당시 청와대 핵심 관계자 A씨는 부인의 투기 의혹을 취재하던 기자에게 ‘실패한 투기’라며 양해를 구했다. 부인이 산 땅은 시골 마을의 산꼭대기 부근이라 직접 찾아가기조차 버거운 곳이었다. 왜 샀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사연은 인근 마을에 찾아가서야 알 수 있었다. 이 지역은 한때 온천 개발 소문이 돌았고, 그즈음 서울 사람들이 땅을 사재기했다.
세계일보는 2003년 ‘파워엘리트 재산대해부’ 시리즈를 통해 1급 이상 고위공직자 재산내역을 전수조사했다. 부동산 투기로 의심할 만한 사례가 적잖아 일일이 해명받기가 버거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어렵게 통화가 된 인사들은 대체로 투기의혹을 완강하게 부인하거나 A씨처럼 속사정을 전하며 읍소했다.
해묵은 기억을 떠올리는 건 김기표 전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의 인사검증 실패 논란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 의혹을 취재해 본 기자들은 대체로 이번 인사검증이 실패라고 단언할 것 같다.
최근 공개된 고위공직자 수시재산등록사항에 따르면 김 전 비서관의 부동산 재산은 91억2000만원, 금융 채무가 56억2000만원에 달한다. 서울 강서구 마곡동의 상가 2채(65억5000만원 상당)를 거액의 대출로 보유했고, 개발지역과 인접한 경기도 광주 송정동의 ‘맹지’를 샀다. 이 정도 팩트라면 당연히 부동산 투기의혹을 취재하는 기자들 검증 1순위 후보다.
검증 대상이 정해지면 투기 의혹 취재는 그리 복잡하지는 않다. 기초자료는 정부 관보나 국회 공보에 게재된 재산공개 내역이다. 고위공직자가 되면 각 기관 공직자 윤리위원회에 본인과 직계 가족의 부동산 등 재산 내역과 규모를 낱낱이 작성해 신고해야 한다.
관보나 공보를 토대로 기사검색이나 구글링을 하고, 취재 대상을 압축해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확인한다. 이를 바탕으로 의심이 나는 지역을 찾아가 부동산 중개소나 마을에서 오래 산 주민 등을 취재하는 식이다. 이 정도 과정이면 대체로 투기인지 아닌지 ‘견적’이 나온다. 이 과정은 2~3일이면 충분하다.
기자들이 며칠이면 할 수 있는 검증을 청와대와 사정당국이 못했을 리 없다. 결국 합리적 의심은 검증팀의 안일한 일처리다. 국민의 눈높이로 보지 않고 “개발행위가 불가능한 지역”이라고 투기의혹을 일축한 김 전 비서관의 말에 기대 두루뭉술 넘어간 것이다.
안일함의 결과는 참혹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말 핵심과제로 제시한 ‘투기와의 전쟁’은 그야말로 무색해졌다. 신뢰회복을 위해 대통령이 사과하며 공들인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 문 대통령은 올해 신년사와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주거 문제의 어려움으로 낙심이 큰 국민들께는 매우 송구한 마음”이라며 공개 사과하며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다.
정권 핵심인사 투기 의혹에서 촉발한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은 부동산 시장의 불확실성을 키운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 21일 기준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보다 0.12% 올랐다. 전주와 동일한 상승률로 2019년 12월 셋째 주(0.20%)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서울 아파트값은 2·4대책 이후 상승세가 주춤하며 지난 3월 말 0.05%까지 상승률이 떨어졌지만 이내 반등세로 돌아서며 지난달 중순부터는 0.1%대의 상승률을 기록하고 있다. 28일 KB국민은행이 발표한 수도권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도 8개월 만에 1억원 넘게 올랐다.
재정·통화 당국 수장의 경고도 먹히지 않는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지난 3일 부동산시장점검 관계장관회의에서 집값이 고점에 근접했다며 하락 가능성을 경고했고, 한국은행도 상반기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집값이 고평가됐다며 대내외 충격을 받으면 대폭 하락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시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오죽하면 김부겸 국무총리가 “방법이 있다면 정책을 어디서 훔쳐라도 오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을까. 벼랑 끝에 몰렸다고 멈춰설 수만은 없다. 기회는 늘 어수선한 가운데 찾아온다. 전열을 정비해 밀도 있고 입체적인 대책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적폐’와 ‘동지’의 흠에 대한 평가 잣대를 정상화하는 것부터 출발하자.
이천종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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