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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군, 점령지서 위협·약탈·학살 일삼아…시골에선 '나치' 색출 혈안

입력 : 2022-04-05 14:59:19 수정 : 2022-04-05 14: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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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접전 벌인 남부 미콜라이우 인근 시골마을
곳곳을 점령한 러시아군 주민 위협·약탈·학살 자행
러시아군이 한 달 넘게 점령했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외곽 소도시 부차에서 지난 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파괴된 러시아군 탱크 잔해가 널려 있는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부차=AP연합뉴스

러시아군이 일부 지역에서 퇴각하면서 한동안 그들에게 점령됐던 주민들이 점령치하의 생활에 대해 생생한 증언을 전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WP)는 4일(현지시간) 러시아 남부 시골 마을 여러 곳 주민들이 전하는 러시아군인들의 만행을 전했다.

 

러시아군인들이 마을에 왔을 때 그들은 집집마다 총을 들이대며 들어와 휴대전화를 빼앗고 집을 빼앗기도 했다. 모든 주민들에게 이웃중 "나치"를 지목하라고 했다. 또 2차 세계대전 중 자생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단체 반더라(Bandera) 대원들도 지목하라고 했다.

 

한 남부 마을에선 러시아군이 59살 수학교사 집 마당에 들이닥쳐 장갑차에 태워갔다고 부인이 말했다.

 

타티아나 보지코는 러시아군이 남편 세르히이가 우크라이나 우파 아조우(아조프) 대대를 지원했다고 비난했다고 했다. 그러나 세르히이는 군복무도 한 적이 없고 민병대는 더더욱 들어간 적이 없다고 했다고 타티아나가 말했다. 타티아나는 실은 남편이 친 우크라이나 발언을 거리낌없이 한 때문에 잡혀갔다고 했다.

 

타티아나가 다음날 목격한 남편은 얼굴 전체가 시퍼렇게 멍들고 팔꿈치에 총을 맞아 팔에 삼각건을 두르고 있었다. 남편은 아직도 풀려나지 못했다. 타티아나는 "저녁까지 집에 보내줄 것이라고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미콜라이우시에선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가 전략요충 흑해 항구 오데사로 진격하는 것을 강력히 저지하고 있다. 미콜라이우를 돌파하지 못한 러시아군이 지난 달 우회를 시도하면서 북쪽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들에 들이닥쳤다.

 

장갑차를 타고 들어온 러시아군은 이 마을을 10일여 동안 점령했다가 우크라이나군에 축출됐다. 주민들은 러시아군이 끔찍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은 러시아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증거 사례가 될만했다.

 

러시아군이 최근까지 점령했던 키이우 주변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프린과 부차 같은 지역에서 주민들이 탄압, 학살, 고문이 있었음을 밝혔다.

 

미콜라이우 지역 주민들은 군인들이 계속해서 총으로 위협했다고 했다. 상점을 부수고 들어와 아이스크림과 상품을 약탈했다. 차량을 도난당한 주민들도 있었고 집에서 쫓겨난 주민들도 있었다.

 

러시아군인들은 푸틴이 주장한 파시스트를 찾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고 주민들이 한결같이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한 허위 선전이었는데도 말이다.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에게 이 마을엔 나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했다.

 

주민수 2000여명의 농촌 마을 로트스키네에서 타티아나 보지코는 러시아군이 지난달 18일 갑자기 사라진 뒤에도 남편을 계속 찾다가 한 이웃으로부터 남편이 매장돼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편의 팔이 덮은 흙 밖으로 나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세르히이의 시신은 훼손이 심해 의사가 부인이 보지 못하도록 막았다. 뒤에 시신 사진을 살펴본 아들 볼로디야는 세르히이가 여러군데 총을 맞았고 팔다리가 부러졌다면서 죽기 전에 심하게 고문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타티아나는 다시 묻힌 남편 무덤가에서 검은 숄을 두르고 손을 가슴 위에 얹은 채 말했다. "몇 달 뒤 남편 환갑이었는데 장례식을 치르네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읖조렸다.

지난 3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에서 시커먼 연기가 상공으로 치솟고 있다. 오데사=AP연합뉴스

지난달 12일 스베틀라나 페두르코 집으로 기관총을 든 군인 4명이 닥쳤다. 주먹쥔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군인들을 맞았다. 너무 겁먹은듯 보였는지 군인들이 겁먹지 말라고 했다.

 

군인들은 "우리가 이 지역 새 당국"이라면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페두르코가 "질서 회복이라니요. 우린 그저 잘 살길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자칭 도네츠크인민공화국 소속 군인들이라고 밝혔다. 페두르코가 로트스키네 마을 촌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페두르코는 이 군인들과 계속 소통했다. 지역의 어린이 숫자가 얼마며 무기를 가진 사람은 누구냐는 등등을 물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찾아왔다. 아침엔 페두르코한테 일을 시켰고 저녁엔 시킨 일을 확인했다.

 

페두르코에게 시킨 일 중 "인도적 지원품"을 분배하라는 적도 있었다. 군인들이 마을 농부 누군가에게서 훔친 감자와 양파를 나눠주라는 것이었다. 종종 페두르코에게 총을 겨누면서 군인들에게 물을 공급하라느니, 공장에서 빵을 만들어 공급하라느니 등을 주문했다.

 

"휴대전화도 없는데 무슨 수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하자 군인들은 알아서하라고만 했다.

 

반군들에 이어 3일 뒤 러시아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페데리코에게 시청 캐비넷을 열라고 하고 문서를 모두 압수했다. 시청 건물 앞에 걸린 우크라이나 국기를 내린 적도 없었지만 자신들이 시를 운영하고 있다고 과시하곤 했다. 지금은 그들이 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느날 장갑차가 집 앞에 나타났고 군인들이 지휘관이 보자고 한다고 전했다. 지휘관은 마을 주민 한 남성 집에서 총과 잡지 2권을 찾았다고 했다. 페두르코는 군인들에게 마을 주민들 가운데 8명이 사냥총 허가를 가지고 있지만 명단에 등재는 돼 있지 않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자 페두르코에게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3시간 넘게 심문했다. 그 남자는 정부가 나라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총을 지급할 때 총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지만 총을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페두르코는 군인들에게 그를 놓아주라고 사정했다. 지휘관이 생각해보겠다면서 그렇지만 "늙은이는 풀어주지 않겠다"고 했다.

 

러시아군인들이 주민을 체포한 첫 사례였다. 페두르코가 "늙은이"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그 장교는 "마약쟁이"라고만 했다. 페두르코는 "마을엔 마약중독자가 없다"고 했다.

 

페두르코가 "늙은이"가 누군지를 알게된 것은 세르히이 보지코의 시신이 발견된 뒤다. 페두르코의 이웃으로 10년 가까이 마을 학교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었다. 선생님이었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선생님이었다"고 페두르코가 절규했다.

 

우크라이나군이 다가오자 러시아군이들이 도착 1주일만에 마을을 떠났다. 마을에선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 러시아 군인들이 도망치면서 주민들의 차와 버스, 심지어 트랙터까지 훔쳐갔다.

 

페두르코는 "마을 주민들을 지키지 못해 죄스럽다"며 눈물을 삼켰다. "저들이 모든 걸 가져갔다"고 했다.

 

로트스키네에서 북서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러시아 전투기가 최소 네 차례 이상 폭탄을 떨어트렸다. 카슈페로 미콜라이우카 마을의 주거지 근처였다. 폭탄 3개는 소들이 풀을 뜯는 들판에 떨어졌다. 4m 깊이의 구덩이가 패였다. 충격으로 벽이 흔들거렸다. 마을 거리는 현재 완전히 인적이 끊겨 있다. 한 여인이 폭격으로 숨졌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외곽에서 지난 4일(현지시간) 6살 소년이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집 마당 한쪽에 묻힌 엄마 무덤 앞에 서 있다. 키이우=AP연합뉴스

일부 주민들이 구부러진 파편을 증거로 보관하고 있다. 파편 중 하나는 무게가 10kg이 넘었다.

 

3일에 걸쳐 러시아군인이 가득 탄 차량 행렬이 흐로모클리아강 위의 작은 다리를 건넜다. 농사짓는 땅에 탱크를 세웠다. 주민이 700명인데 군인들이 "수천명"이었다고 주민들이 전했다.

 

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수 km 길이의 비포장도로에서 러시아군인들이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주민들은 러시아 군인들이 헤르손 지역 종이 지도만 있었을 뿐 미콜라이우 지역 지도는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러시아군인들이 마을에 10일 동안 머물렀다. 마을 문화회관과 어린이 놀이터 근처 숲속에 참호를 팠다. 장갑차량들을 들판이나 쓰지않는 창고에 세워뒀다.

 

"러시아군"이라고 쓴 녹색 점심 도시락이 아직도 마을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한 여인이 도시락 통을 개밥그릇으로 쓴다고 했다.

 

군인들은 마을 학교를 사령부로 사용했다. 처음 도착했을 때 러시아 군인들은 모든 남자들을 체포해 손을 뒤로한 채 벽에 기대고 바닥을 바라보도록 했다. 무기를 가졌느냐고 한사람씩 물었고 등록되지 않은 총을 가졌다고 실토한 사람들을 때렸다.

 

마을 주민 이반은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군인들이 다시 집안을 수색해 장남감, 옷가지, 부엌의 냄비와 프라이팬까지 모든 집기를 끌어냈다. 카슈페로 미콜라이우카 학교 근처에서 상점을 운영하는 세르히예는 침실 창문과 현관 노크 자리에 총구멍이 났다고 했다. 러시아군인들이 말도 없이 총으로 쏜 뒤 자신들이 이곳에서 살기로 했다고 해 그와 부인은 10일 동안 지하실에서 지내야 했다.

 

신형 미쓰비시 SUV인 세르히예의 자동차가 차고에 있었다. 어느날 밤 군인들이 자물쇠를 부수고 앞창문에 총을 쐈다. 차 대시보드 위에는 아직도 깨진 유리조각들이 그대로 있으며 차에는 총구멍이 나 있다. 차고 벽에도 총탄자국이 있었다.

 

일부 주민들이 "사람이 안에 있음"이라고 현관에 써붙여 두었다. 러시아군인들이 자신들을 인간방패로 써 겁이 났다고 했다. 우크라이나군이 진격해올 때마다 러시아군인들이 장갑차를 주거지와 주택 차고 앞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러시아군 폭격으로 집이 부서진 알라 샤포발로우나는 "러시아군인들은 자신들의 장비를 주택 옆에 세워두면 우크라이나군이 포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샤포발로우나가 며칠 뒤 옮겨간 친척집도 폭격을 당했다. 파편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그와 아이들이 자고 있는 옆의 벽에 박혔다.

 

간호사인 유리는 군인들이 "하루 다섯번씩" 찾아와 "협력자"가 누구냐고 물었다고 했다. 러시아군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마을 주민 누군가가 우크라이나군에 알려준다고 의심했다. 마을에 들어온 첫날 휴대폰과 심카드를 모두 압수했으면서도 그랬다.

 

샤포바로우나는 "휴대폰을 감춘 것이 적발되면 곧바로 쏴죽일 것이라고 했다"고 전했다.

 

인근 다른 마을에서처럼 러시아군인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찾았다. 한 역사 교사가 집을 수색하면서 "우크라이나 역사"교재를 찾아내고는 그가 동조자라고 위협했지만 주민들이 학교 교과서라고 말하자 놓아줬다.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오데사의 철도역에서 지난 4일(현지시간) 피란 열차에 오른 9살 여자 어린이가 아빠와 헤어지면서 애써 울음을 참고 있다. 오데사=AP연합뉴스

러시아군인들은 또 "검은 옷을 입은 나치들"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고 주민들이 전했다. 은퇴자 나데즈다는 "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군인이 '그럼 옆집에 물어보겠다'는 식이었다"고 밝혔다.

 

로트스키네에 사는 타티아나와 세르히히 보지코는 전쟁이 터질 때 집을 수리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이 오면 어찌해야할 지 몰라 걱정했다. 세르히이는 소셜미디어에서 친우크라이나 입장을 거침없이 밝혀왔고 이 때문에 러시아군인들이 문제삼을 것같았다. 그렇지만 장애인인 타티아나의 어머니 때문에 마을에 머물기로 했다.

 

러시아군인들은 세르히이가 아조프 대대 소속이라고 주장하면서 버려진 군 차량에서 가져온 수류탄을 기념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것을 문제삼았다. 수류탄을 넘겼지만 풀어주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다른 주민들도 부서진 장갑차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었지만 유독 세르히이만 문제삼았다고 했다.

 

타티아나가 세르히이를 본 것은 그가 얻어맞고 팔에 총을 맞은 뒤였다. 집으로 돌아와 의약품을 챙겨서 다시 갔지만 그가 없었다. 자건거를 타고 마을 끝까지 러시아 참호와 사령부를 찾아 다니면 물었지만 모두 남편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거나 곧 집에 갈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아침 러시아군이 사라졌다. 세르히이에 대해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타티아나는 "그들이 어느 쪽으로 갖는 지조차 몰랐지만 남편을 데려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이 탄 차를 찾아낼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고 했다.

 

마을 공동묘지에 있는 세르히이 무덤의 묘비엔 그가 3월18일 숨진 것으로 적혀 있다. 그러난 타티아나는 남편이 정확히 언제 숨졌는 지 몰랐다. 더 빨랐을 수도 있었다. 군인들이 곧 집에 돌아갈 거라고 했을 때 이미 숨졌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타티아나는 남편 무덤 앞에서 그가 엄격하면서도 쾌활한 할아버지였다며 눈물을 흘렸다. 러시아군인들이 끌고갈 때 남편이 옷입는 걸 신경쓰지 못해 춥지 않게 입었는지 살펴보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 때가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때였음을 알기만 했어도"라고 한탄한 타티아나는 "나도 이젠 남편처럼 조용히 살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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