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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 닮은 형상들… 산업화된 세상의 미적 감수성

입력 : 2022-10-03 20:08:46 수정 : 2022-10-04 18: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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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갤러리 ‘이승조 개인전’

한국 기하추상의 선구자… 작고 32주기
‘핵’ 연작 등 주요 작품 30여 점 선보여

기차 여행 빠르게 스치는 잔상의 감동
아폴로 발사 이후 새 공간 의식이 자극
파이프 그림 시작… 탈회화적 추상 제시
“형상 이면의 선과 색채 앙상블 읽어야”

“기차여행 중이었다. 눈을 감고 잠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얼핏 무언가 망막 속을 스쳐 가는 게 있었다. 나는 퍼뜩 눈을 떴다. 집에 돌아온 즉시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마음에 남은 이미지를 조작한 결과 오늘의 파이프적인 그림을 완성했다.”

 

한국 기하추상의 선구자 이승조(1941∼1990)는 1982년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왜 파이프를 닮은 선들을 그리게 됐는지 이렇게 말했다. 눈을 감고도 보인 환영이 눈뜨고 본 무엇보다 강렬해 화가를 사로잡았다. “마치 첫인상이 강렬한 사람을 못 잊음과도 같은 미묘한 감동에 휩싸였다”며 창작 과정을 설명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승조(1941∼1990) 작가 생전 모습. 국제갤러리 제공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국제갤러리에서 이승조 개인전이 한창이다. 한국 기하추상의 주요 작품 30여점이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맞고 있다.

 

이승조는 194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뒤 해방공간 한반도에서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중·고교 시절 미술반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1960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청년 이승조는 전위그룹을 결성하며 한국 모더니즘 미술을 추동했다. 1962년 권영우, 서승원 등과 함께 기존 미술 제도와 기득권에 맞서 ‘오리진(origin)’을 결성했고, ‘아방가르드 그룹(AG)’ 창립에도 함께했다.

 

오리진, 즉 근원을 좇으며 자기만의 조형언어를 만들어가던 그는 1967년 ‘핵(核)’ 연작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최초의 ‘핵’ 발표 넉 달 후 파이프 형상이 등장하게 된다. ‘핵’ 연작의 열 번째 작품이기도 했다. 기차 안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풍경과 사물의 잔상을 감은 눈 속에서 본 뒤 그려낸 것이지만, 파이프를 닮아 일명 ‘파이프 그림’으로도 불리게 됐다. 폐허가 된 땅 위에서 재건 중이던 한국 사회, 국제적으로는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던 1960∼1970년대를 배경으로, 그의 그림은 급속한 기술발전에 따라 급변하던 미적 감수성을 연구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앵포르멜이 당대 한국 추상 미술계를 대표했다면, 이승조의 독특한 기하추상, 차가운 추상은 새롭게 파란을 일으켰고 여러 평론을 낳았다. 

이승조 ‘핵(Nucleus) 85-21’(1985). 국제갤러리 제공

‘파이프’라고 편히 부르는 목소리들 틈에서 형상을 읽어내려 하지 말고 “선과 색채의 앙상블”을 읽어야 함을 강조하는 평론가 이일은 “조형의 기본 원리인 규칙적 반복의 질서를 통해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말한 ‘자기환원적 추상’, ‘탈회화적 추상’의 세계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국제갤러리 측은 기계미학 이론가 이영준의 말을 인용해 “급격히 산업화되고 현대화된 세상의 새로운 감수성에 대한 반응”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새로운 기계문명이 가져온 지각방식의 변화가 평면이라는 캔버스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대한 고민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며, 기차여행 언급에서 보듯 이승조는 현대미술의 발전과 기계미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작가”라고 했다.

 

그의 그림은 지금도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떤 이는 20세기 초 속도와 기계문명에서 미래적 미의식을 찾아내려 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 회화 사조를 읽어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기하학적 형태로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프랑스 옵아트 계열 미술을 받아들이려 한 것이 아닐까 궁금해한다. 그러나 한국의 아방가르드는 전후 빈곤 속에 대학을 다닌 청년 미술인의 사명감, 예술가 책무를 잊지 않으려는 양심, 한국만의 미를 놓지 않으려는 의지로 태어난 자생적 토착 운동 그룹이다. 그는 그저 “아폴로 우주선 발사로 새롭게 우주의 공간 의식에 눈뜨고부터 시작한 이 작업이, 작가인 내가 사는 시대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 같다”는 말로 작업 아이디어를 설명했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작고 30주기 회고전 ‘도열하는 기둥’ 전시 후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유족이 갖고 있던 1970년 작품 ‘핵 F-G-999’을 소장했다.

전시 전경. 국제갤러리 제공

지금 시선으로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매끈하게 빠진 선이나 사진처럼 보이는 색띠 화면은 작가 고유의 방법론으로 치밀하게 그려낸 유화들이다. 넓고 납작한 평붓을 골라 양 끝에는 어두운색 물감을, 붓 가운데에는 밝은색 물감을 묻혀 직선을 긋는다. 붓질을 반복하며 거친 경계가 흐려지도록 그러데이션을 만든다. 형상의 테두리는 미리 종이테이프를 붙였다가 붓질 후 떼어내는 방식으로 만든다. 마치 파이프나 원기둥처럼 보이는 입체적인 직선이 생긴다. 붓질을 마친 후엔 사포질을 해 화면을 더욱 매끈하게 갈아낸다. 사포질까지 한 유화의 표면은 더욱 윤기를 낸다. 파이프의 금속성 환영이 더해진다. 엄격한 질서 속에 기개 넘치는 선들이 완성된다. 

 

치열한 고민을 동반해 그 땅에서 태어나고 호흡한 그림만이 끊임없이 의미를 재창출하고, 그런 작가들이 재발견된다. 자명한 사실을 가짜뉴스로 낙인찍거나, 우기면 그만이라는 듯 악다구니 쓰는 것이 세상과 권력의 작동원리가 된 지금, 자명함을 엄격하게 드러내는 회화가 다시 동시대 한국민과 호흡하는 듯하다. 그의 색띠는 급격한 퇴행 속에서도 전진을 꿈꾸게 하고, 가려지지 않는 핵심, 현혹에 맞서는 단단한 쇠기둥으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은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넘어, 미래에서 온 선구자의 언어처럼 해독의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아직 알아내지 못한 우주적 질서로 나아가도록 후세를 안내하는 듯하다. 10월 30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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