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셔먼·오를랑·고명근·권부문…
국내외 작가 15人 독특한 시선 조명
전통에 갇힌 사진 기능에서 벗어나
회화·매체 결합 다차원 이미지 구현
필시 살육의 현장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폭력적인 화면과는 대조적으로 피가 보이지 않는다. 상처와 처절함, 파괴된 잔해를 발견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이는 오히려 폭력과 전쟁이 지속되는 이 세계에 더욱 강력히 반성을 촉구하는 작용을 한다.
바로크 회화의 도상에 이데올로기와 역사, 윤리의 종말을 마치 놀이처럼 구성해 시각화한 작품 ‘최후의 반란(Last Riot)’ 시리즈 중 하나다. 러시아의 4인조 작가그룹 AES+F의 대표작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AES+F는 디자인, 건축 분야에서도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 전통 회화가 지닌 영웅적 서사를 활용해 기술과 물질이 생산해 낸 가상 세계에 대한 염려와 비판을 충격적인 이미지로 묘사한다. 인물들의 학살을 연상케 하는 몸짓이 놀이처럼 보이도록 로열발레단 단원들을 모델로 기용해 화면을 연출했다. 심지어 패션 화보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한다.
작가 고명근은 조각과 건축물 등 입체 매체를 평면 사진으로 만들고 압축된 이미지들을 다시 입체로 전환하는 작업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실 대 비현실, 평면 대 공간, 그리고 실재 대 환영에 대해 질문한다. 투명한 소재로 작품을 만드는 것은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변화하는 중첩 효과를 통해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대상의 ‘환영(illusion)’을 경험케 하려는 것이다.
신디 셔먼, 로만 오팔카, 칸디다 회퍼, 권부문 등 국내외 유명 사진작가 15명의 독특한 시선을 조명하는 특별전이 ‘A BRINK OF INFINITY(어 브링크 오브 인피니티): 무한함의 끝’이란 주제를 내걸고 6월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창성동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열린다.
신디 셔먼은 미국 현대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사진작가 중 하나로 꼽힌다. 전통에 갇힌 사진 기능에서 벗어나 영화, TV, 잡지, 예술사진 등 다양한 매체에서 얻을 수 있는 이미지를 차용해 재구성해왔다. 특히 1970년부터 자신을 직접 모델로 등장시킴으로써 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여성 이미지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모더니즘과 가부장적 남성 사회를 비판, 여성의 존재감을 전면에 내세우는 출발점이 된다. 그의 ‘광대(Clowns)’ 시리즈는 분장에 가려진 다양한 감정들과 자아를 이야기한다. 사회의 정해진 틀에 맞춰야 하는 슬픈 존재로서의 여성을 표현한다. 일그러진 표정과 호소력 짙은 눈빛은 작가의 의도된 연출이다.
폴란드 출신 프랑스 작가 로만 오팔카는 1965년부터 2011년 작고하기까지 지속적으로 ‘인생 프로그램’ 연작을 통해 자신의 일생을 관통하는 ‘시간성’을 시각화하는 데에 몰두했다. 자신의 얼굴 사진을 남기는 새로운 양식의 시리즈를 탄생시켰다. 이 연작은 항상 같은 촬영 조건인, 흑백 사진, 무표정한 정면 얼굴, 흰 셔츠, 동일 조명과 촬영기기를 엄격하게 지켜 완성됐다. 작품들을 비교해보면 비록 동일 조건이지만 미묘하게 바뀐 작가의 모습을 구분할 수 있다. 이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한계인 시간성을 개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구체적 흔적을 기록한 것이다.
로빈 로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태어나 요하네스버그에서 성장한 행위미술가다. 요하네스버그 길거리에서 주로 작업을 진행하며, 벽과 인도를 무대로 생동감 넘치는 드로잉과 해프닝을 결합한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2D 이미지와 3D 퍼포머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 스트리트아트, 페인팅, 퍼포먼스, 영상, 사진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도심의 청년 문화와 경제적 불평등 등 사회 문제를 다룬다.
인간과 공간의 상호관계와 건축 공간이 지닌 기하학적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는 칸디다 회퍼는 대성당, 도서관, 오페라하우스 등 공공 건축물의 내부공간을 사진으로 담아낸다. 프레임 속 인간의 부재는 정적인 공간을 강조하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인간의 존재감을 인식시킨다. 더불어 관람객에게 프레임 내 공간을 배회하는 상상을 유도해, 소외감을 이끌어낸다.
토마스 루프는 증명사진처럼 감정이 배제된 중성적 외면의 인물 초상 시리즈나 건물 사진을 주로 찍어오다가 2003년부터 인터넷에 나도는 포르노그래피 사진을 바탕으로 한 누드 시리즈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작품 ‘Nudes(누드스) c 02’는 얼굴에 복면을 하고 팔을 뒤로 묶은 마조히즘적 포르노그래피의 여성 누드다. 전통 사진 기법 대신 디지털 작업을 거쳐 음침하고 흐릿한 갈색톤으로 연출, 사진의 고유한 특성인 피사체의 선명성을 부정하면서 포르노 사진의 저속성을 완화한다. 또한, 현실 세계 속 인물이 아닌 것 같은 효과를 발현, 회화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권부문은 인간의 흔적을 배제한 대자연의 풍경을 엄중하고 냉정한 태도로 포착해낸다. 그의 사진은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의미를 담은 풍경, 특별한 기술이 개입된 이미지로서의 풍경에서 발을 돌려 보는 이에게 열린 풍경, 체험의 풍경, 고독과 자유 정신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는 대상과 보는 자의 관계 문제를 작업의 중심에 둔다. 관람객과 작가가 대상을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조응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같은 시선으로 풍경에 대해 인식하길 원한다.
로니 혼의 작품에서는 대자연이 주는 중압감이 묻어난다. 정적인 사진인데도 바라보고 있으면 엄청난 동적 에너지가 전해진다.
이 밖에도 ‘사진 개념주의 선구자’ 이언 월리스, 기존 정물사진을 새롭게 재해석한 빅터 슈레거, 포토몽타주 및 행위예술로 유명한 린더, 10대 때부터 퍼포먼스 아티스트로 이름을 떨친 ‘성형수술 프로젝트’의 오를랑, 중국 현대사진을 대표하는 슈용,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 터너상을 수상한 독일의 볼프강 틸만스의 명작들이 관객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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