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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만의 ‘백제의 미소’… ‘한국의 메디치’ 삼성家의 예술 사랑 [이동수는 이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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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6-04 17:00:00 수정 : 2024-06-04 1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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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소년이다. 그러나 목·허리·다리 세 곳을 엇갈린 방향으로 틀어 S자 굴곡을 드러낸 삼곡(三曲) 자세에선 여성미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입가에 자꾸 눈길이 간다.

 

4일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대규모 기획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이하 연꽃처럼)에서 만난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이하 백제관음상)의 모습이다. 일명 ‘백제의 미소’. 한반도 고대 불상 가운데 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백제관음상이 고국 땅을 밟은 것은 79년 만이다. 1907년 충남 부여 규암리 밭에서 한 농부가 솥에 담긴 상태로 발견한 뒤 1922년 일본인 이치다 지로에게 팔렸다. 이후 1929년 대구에서 전시된 뒤 이치다가 해방 직후 일본으로 가져간 것으로 알려졌다.

 

조지윤 호암미술관 소장품연구실장은 기자와 만나 백제관음상이 전시회에 오르기까지 과정을 “정말 극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4일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이동수 기자

삼성문화재단은 이번 전시를 장장 5년간 준비했다. 호암미술관의 첫 고미술 기획전이자 한국과 일본, 중국 3개국의 불교미술을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본격 조명한 세계 최초의 전시로 기획했다.

 

백제관음상은 기획 초부터 핵심 작품으로 선정돼 소재 파악이 중요했다. 1970년대 이치다가 사망한 뒤 행방이 묘연했다. 소유자가 아닌 대행자와 겨우 연락이 닿아 대여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삼성문화재단은 포기하지 않고 대행자를 통해 소유자에게 한 번만 더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조 실장은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전시회 개막 두 달 전쯤 갑자기 연락이 왔다. 그것도 전시회 기간 내내 흔쾌히 빌려주겠다고 하더라”라며 “해방 이후 최초로 국내에서 일반인에게 백제관음상을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문화재를 향한 삼성문화재단의 이같은 끈기는 삼성그룹 창립자이자 삼성문화재단을 출범시킨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으로부터 시작됐다.

호암미술관 전경. 삼성전자 제공

이 창업회장이 고려 불화인 국보 ‘아미타삼존도’를 일본 소장자로부터 비밀리에 사 온 일화가 대표적이다. 소장자가 ‘한국에는 절대 팔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자 이 창업회장은 미국에 있는 삼성물산 지사의 외국인 임원까지 동원해 기어이 작품을 구매했다. 아미타삼존도는 그렇게 미국을 거쳐 고국에 돌아왔다.

 

호암미술관이 설립된 것도 해외에 유출되고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소멸할 위기에 놓인 귀중한 민족문화 유산들을 수집·보호하고자 하는 이 창업회장의 의지의 발현이다. 그는 30여년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을 기반으로 1982년 호암미술관을 개관했다. 

 

이 창업회장의 유지는 이건희 선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으로 이어졌다.

 

이 선대회장의 컬렉션은 ‘KH유산’이라 불릴 정도로 방대했다. 조 실장은 “이 창업회장이 적절한 가격으로 좋은 작품을 구매했다면, 이 선대회장은 ‘위대한 우리 문화재라면 돈이 얼마나 들던 환수 해야 한다’는 스타일이었다”고 말했다. 이 선대회장이 2004년 리움미술관 개관식에서 “비록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지라도 이는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호암미술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기획전에 전시 중인 불교 미술품 전경. 삼성전자 제공

이 회장은 이 선대회장 타개 뒤 2021년 KH 유산 2만3000점을 국가기관에 기증하며 사회 환원에 나섰다. 이 선대회장이 기증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 △궁중숭불도 △자수 아미타여래도 등도 이번 기획전에 함께 전시됐다.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 교수는 이를 두고 “이 선대회장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르네상스를 이끈 메디치 가문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남긴 한국의 시대 정신”이라 평가했다. 그만큼 삼성이 국내 미술문화 부흥과 국민의 ‘문화 향유권’ 향상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뜻이다.

 

백제관음상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에 단 6점 남은 고려시대 국보급 작품 ‘나전 국당초문 경함’. 오른쪽 사진은 경함 표면을 장식한 자개 조각 근접 사진. 이동수 기자

기획전에서 선보이는 고려 시대 국보급 작품 ‘나전 국당초문 경함’은 전 세계에 단 6점만 남은 진귀한 명품이다. 옻칠한 나무 위에 0.5㎝도 채 안 되는 무지갯빛 영롱한 작은 자개 조각 하나하나를 붙여 9개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수천개의 국화 무늬를 표현했다. 청자, 불화와 함께 한국미술의 섬세하고 독창적인 공예미를 대표하는 고려 나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다시 없는 명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호암미술관 관계자는 “한국, 중국, 일본 모두 나전 경함을 만들었지만 당시 고려 나전을 최고로 칠만큼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었다”며 “수만 개의 자개 조각 하나하나에 담긴 무지개, 찬란한 빛이야말로 고려가 도달했던 ‘고려의 빛’”이라고 말했다.

 

연꽃처럼 기획전은 한국과 일본, 미국, 유럽에 소재한 27개 컬렉션에서 불교미술 걸작품 92점을 한 자리에 모은 극히 이례적인 전시다. 92건 중 한국에 처음 들어온 작품이 무려 47건이다. 국내외 미술전문가들이 “세계 유수의 불교미술 명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어쩌면 우리 생에 한 번밖에 없을 특별한 기획전”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다.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컬렉션으로 국립 기관에 기증됐다가 이번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기획전에 전시된 세 작품. 불설대보부모은중경(왼쪽 위), 궁중술불도(왼쪽 아래), 자수아미타여래도. 이동수 기자

백제관음상은 16일 전시회가 끝난 뒤 2주 이내에 다시 일본에 반환된다. 연꽃처럼 기획전은 3월27일 개막 뒤 지난달 말까지 6만여명이 관람하는 등 하루 평균 관람객 수가 1000명 이상을 기록했다. 이 회장도 이번 전시를 5번 반복해 관람한 것으로 전해졌다. 6월16일 폐막까지 10여일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 백제관음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동 중’은 핑계고, 기자가 직접 체험한 모든 것을 씁니다.

이동수 기자 d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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