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기대작
노년의 女킬러·젊은 男킬러 결전 그려
전설의 킬러 ‘조각’役 맡은 배우 이혜영
폭발적 존재감으로 극의 흐름 이끌어
고독했던 삶의 균형·갈등 등 잘 담아내
투우·총격전 등 고난도 액션도 볼거리
45년 동안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 살인을 업으로 살아온 전설의 킬러 ‘조각’(이혜영)은 어느덧 예순을 훌쩍 넘겼다. 예전 같지 않게 삐걱거리는 육체 탓에 어느새 퇴물 취급을 받는 조각. 노화와 쇠잔의 과정을 겪으며, 철저한 고독으로 유지되던 삶에 균열이 생긴다. 무정하고 냉혹하게 스스로를 단련해온 내면엔 타인에 대한 연민이 자리 잡고, 어느새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겨난다. 노쇠해가는 조각과 달리 신성(新星) 킬러 ‘투우’(김성철)는 왜인지 조각 주변을 불쾌하게 맴돌며 위협을 가한다.
민규동 감독의 영화 ‘파과’(30일 개봉)는 노년의 여자 킬러 조각과 젊은 남자 킬러 투우의 ‘최후의 결전’을 향해 달려나가는 액션물이다. 소설가 구병모가 2013년 출간한 원작 소설은 37쇄를 찍은 베스트셀러다. 뚜렷한 캐릭터와 흥미로운 소재, 사건의 기승전결 구조 덕에 출간 직후부터 영화화 기대작으로 손꼽혔고, 지난해에는 동명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민규동 감독은 원작 내용과 설정, 캐릭터를 자신의 취향과 관점으로 대폭 각색했다. 민 감독은 136고(稿)까지 가는 오랜 각색작업을 진행했다.

◆킬러의 업은 신성(神聖)할 수 있을까
원작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살인이라는 자신의 일을 보는 조각의 시각이다. 영화 속 조각은 죽어 마땅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하고, ‘해충’ 같은 인간을 처리한다는 신념을 지킨다. 그는 자신의 일이 “악성 벌레 퇴치하는 신성한 일”이자 “벌레 잡고 아픈 사람 구원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죄없는 아들을 린치해 식물인간으로 만든 마약 카르텔을 처단해 달라는 필부의 절규를, 조각은 외면하지 않는다. 아무리 위험한 의뢰라 해도, 이런 종류의 살인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 소설의 조각은 살인에 어떠한 의미도 담지 않고, 타인 목숨의 가치를 판단하지도 않는다. 소설 속 조각은 살인이 신성하기는커녕 더러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며 살아갈 뿐이다.

영화에서 ‘죽어 마땅한 악인’을 벌레 잡듯 방역한다는 설정은 낯설디낯선 ‘나이 든 냉혹한 여성 킬러’ 캐릭터가 대중 공감을 얻기 힘들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만들어진 일종의 연결 장치로 해석된다. 그러나 영화가 조각에게 자경단의 다크 히어로 분위기를 덧입힌 건 득보다 실이 큰 선택으로 보인다. 40여년간 벌레 없애듯 사람을 죽여온 조각이 누군가의 ‘죽어 마땅함’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아전인수식 셈법 아닌가. 조각을 판관의 위치에 세울 게 아니라, 삶의 어떠한 달콤함도 욕망하지 않고 살아온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그의 직업 정신을 부각했다면 이 캐릭터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혜영의 폭발적 존재감 돋보여
영화에서 조각이 과거에 사로잡혀 종종 현실 속에서도 과거에 머문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 역시 원작과의 큰 차이다. 플래시백은 영화 곳곳에 틈입하고, 조각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죽은 스승 ‘류’(김무열)를 만난다.

이러한 전개를 이 영화만의 강점이라고도, 결함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건, 과다한 설정 탓에 자칫 어색하게 느껴지는 구간에서조차 폭발적 존재감을 발산하며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하는 배우 이혜영의 힘이다.
‘60대 여성 킬러’라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배역을 맡아 그는 노쇠함이 깃드는 조각을 완벽하게 표현했다. 젊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과 그 가족들을 만난 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던 류의 말을 뒤로하고 지키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 생겨나는 조각의 모습은 이혜영 덕에 설득력을 더한다. 산전수전을 다 겪고 세월의 더께가 앉은 킬러를 표현하기에 제격인 그의 눈매와 콧날과 턱선이, 단단히 울리는 중음역 목소리가 만드는 힘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올해로 63세인 이혜영은 젊은 배우도 감당하기 힘들어 보이는 고난도 액션 장면을 소화했다. 스턴트맨의 도움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액션을 직접 소화하며 촬영 중 갈비뼈 골절과 손목·무릎 부상 등 숱한 부상을 당했다. 투우와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로프를 타고 건물을 움직이며 총격을 벌이는 강도 높은 액션을 선보였다. 28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혜영은 “두려우면서도 도전하는 마음으로 작품에 임했다”며 “액션 장면을 찍을 때 아파도 (조각의) 쿨한 태도를 유지하며 아픈 티를 내면 안 되고, 힘을 줄때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촬영 내내 다치고 회복은 더뎌 걱정이 많았는데, (영화를 보니) ‘감독님이 다 생각이 있으셨구나’ 싶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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