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조현 외교부 장관이 취임 후 처음 중국을 방문해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우리 외교장관에 해당)과 만나 회담을 했다. 이 자리에서 조 장관은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실현을 위한 실질적 진전을 추구하고 있다”는 말로 한국 이재명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를 설명했다. 이어 “북한이 대화에 복귀할 수 있도록 중국이 노력을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왕 부장은 “중국은 한반도 평화·안정을 위한 건설적 역할을 지속해 나갈 것”이란 원론적 답변만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외교부는 왕 부장이 회담에서 ‘비핵화’를 언급했는지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

최근 국제 외교 무대에서 단연 존재감을 드러낸 인물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었다. 그는 중국의 제2차 세계대전 승전 80주년을 기념하고자 지난 3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 참석해 중국 정부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김정은의 자리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바로 왼쪽에 마련한 것부터가 의전상 최고의 예우였다. 시 주석 바로 오른쪽 좌석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앉힌 점만 봐도 그렇다. 중국을 필두로 한 반(反)자유주의·반서방 진영에서 북한이 중국, 러시아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서열의 국가라는 점을 만방에 과시한 것 아닌가.
열병식 이튿날인 4일 김정은은 시 주석과 양자 정상회담을 했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5대 상임이사국의 일원으로 핵무기 확산 방지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책무가 있다. 실제로 중국은 북한이 앞서 6차례에 걸쳐 핵무기 실험을 했을 때마다 안보리가 채택한 대북 제재 결의안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 시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의향이 있다”는 원론적 얘기만 했다.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92년 9월28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한·중 수교 후 처음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양상쿤(楊尙昆) 중국 국가주석과 만났다. 최초의 한·중 정상회담에서 양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튿날 국내 조간 신문들은 이 소식을 앞다퉈 1면 톱 기사로 전했다. 남북 관계에서 중국이 커다란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감이 넘쳐났다. 하지만 오늘날 북한은 “남과 북은 딴 나라”라며 을러대고, 중국은 태도가 싹 바뀌었으니 그저 허탈할 따름이다. 노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의 중국 대사 부임을 계기로 우선 한·중 관계라도 좀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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