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타자의 시선 속에서 서사를 재해석하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의 한 줄기는 한민족이 하늘부모님을 모시는 신앙을 바탕으로 효정·순결·정절의 윤리와 가족 사랑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온 전통을 개관한다. 예컨대 효는 부모 공경을 넘어 생명의 근원을 공경하는 인륜의 근본으로서 사회와 국가를 지탱하는 정신이 되었고, 시묘살이·제사·효행담(황희, 심청 등)과 여성의 정절·자녀교육(신사임당, 한석봉의 모친)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덕목은 부부·가정·자녀양육의 문화로 확장되어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했으며, 백의민족의 정결성과 평화애호의 미감으로 표상되었다. 동시에 한민족은 외침 앞에서 공의로운 한마음으로 자주성을 지키며 을지문덕·광개토대왕·강감찬·이순신과 승병·의병의 항전으로 국가를 보전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이회영·안중근·유관순·안창호·신채호 등 독립운동으로 그 정신을 계승했다. 주목할 점은 외세와 맞서 자기를 지켜 온 저항 서사가 이 모든 층위에 깊이 스며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한민족 서사의 할 줄기를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전통적 권위’ 개념과 팔레스타인 출신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개념을 통해 새롭게 조망하고자 한다.

효정과 순결, 정절의 재전유
한민족의 전통은 내부적으로 사회적 결속과 정당성을 낳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고(베버), 외부적으로는 제국주의 담론 속에서 타자화·통제되거나, 한 번 비유된 것이 다른 맥락에서 새로운 의미로 활용되는 재전유(再轉喩)의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즉, 가족과 공동체를 지탱해 온 전통적 가치, 곧 효의 서사에서 자녀의 봉양과 조상 제사는 사회질서의 기반이자 베버가 말한 전통적 권위의 전형이다. 규범이 반복·재현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회는 자발적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정절의 서사는 여성 서사와 맞닿는다. 신사임당의 모범적 가정생활, 춘향의 절개, 심청의 효행은 개인의 미덕을 넘어 가문의 명예와 사회적 신뢰를 보존하는 장치였다. 베버적 관점에서 이는 성 역할을 고착화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안정시키는 권위로 기능한다.
군사적 저항은 전통의 언어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영웅 을지문덕·이순신·광개토대왕은 ‘하늘의 뜻’과 ‘조상의 유훈’을 실현한 존재로 기억되고, 사명대사·곽재우 등 승병과 의병의 등장은 국가 제도보다 조상과 하늘의 권위에서 힘을 얻었다. 근대 이전 제도가 취약할 때 전통은 공동체 결속과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은 이러한 전통이 외부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일제의 백의(白衣) 착용 금지는 단순한 행정명령이 아니었다. ‘후진적 습속’으로 규정된 백의 전통을 교정한다는 명분 아래 지배를 정당화하는 담론이 작동한 것이다. 서구의 시선 속에서 동양은 고정된 이미지로 소비되고, 그 과정에서 전통은 축소·재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민족은 이에 수동적으로 머물지 않았다. 백의를 더욱 고수하거나 의병으로 봉기한 행위는 외부의 규정에 대한 저항이자 자기 문화를 재정의하는 시도였다. 이는 사이드가 말한 재전유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한국의 효문화를 인류 보편의 자산으로 높이 평가한 사례는 외부 시선의 전환을 보여주며, 자기 문화를 세계 담론 속에 재배치하는 전략으로 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이회영·안중근·유관순·신채호로 상징되는 독립운동 또한 베버적으로 보면 하늘부모님을 모신 효·정절·공의의 규범을 전통적 권위로 호명해 집단행동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한 가치합리적 행위로 전화한 사례다. 예컨대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같은 도덕적 정당화, 유관순의 희생의례화, 이회영의 헌신과 신흥무관학교라는 카리스마의 생성 등이 그것이다. 동시에 사이드의 관점에서 이는 식민 권력이 부여한 타자화에 맞선 대항 담론의 구축이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표상의 주도권을 내부로 회수해 한국사의 주체성을 재서술했고, 독립운동은 백의·제사·공의의 언어를 재전유해 제국의 규범을 전복적으로 자기화했다.
오늘날 전통은 문화상품과 국가 브랜드의 형태로 세계에 소개된다. 이 과정에서 전통이 단순화되어 ‘흥미로운 이국성’으로만 소비되거나 내부 행위자가 외부 시선을 의식해 자기 문화를 재포장하는 ‘자기 오리엔탈리즘’이 나타날 위험도 존재한다. 전통을 수출하면서 그 의미가 축소되거나 균질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민 전통은 강력한 국가 자산이다
그럼에도 국가의 전통은 여전히 강력한 자산이다. 특히 한민족의 선민 의식과 효와 정절, 역사적 저항의 서사는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외세에 맞서 공동체를 지켜 낸 힘의 원천이었다. 오늘날에도 그것은 한국이 세계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소프트 파워로 기능한다.
‘한민족 선민 대서사시’를 베버의 전통적 권위 개념으로 보면 규범을 내면화해 사회적 안정과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질서의 기제였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개념으로 보면 저항과 재전유의 수단으로 활용된 서사였다. 궁극적으로 한민족 서사는 내부의 결속과 외부의 시선을 아우르며, 전통이 권력과 문화, 저항과 재창조의 장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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