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천사’◇‘모세의 숲에서 만난 천사’ |
조 신부가 붓과 연필로 그려낸 천사 이미지에 정 시인이 짤막한 시구를 적었다. 100여점의 천사들은 조 신부가 지난 5월 가나아트포럼에서 전시했던 작품이다. 연필로 민첩하게 작업한 드로잉과 원색으로 찬란한 유리화엔 갖가지 천사들의 모습이 담겼다. 조 신부는 “우리 모두에게는 천사성이 있다”며 “만인에게 내재한 다양한 천사들을 표현했다”고 말한다.
조 신부가 그린 천사는 신화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성과 속의 동체다. ‘분노의 천사’ ‘안타까움으로 괴로운 천사’ ‘추락한 천사’ ‘질문하는 천사’ ‘장난기 있는 천사’ 등엔 천상의 성스러움이 아닌 인간의 희로애락이 묻어 있다. 정 시인은 조 신부의 그림을 “동네에서 마주치는 우리 삶 속의 천사”라고 평한다. 그림에 어울리는 언어를 찾을 때도 이 점을 염두에 뒀다.
가령 ‘추락하는 천사의 얼굴’에 붙인 글은 “때때로 천사도 교만해질 때가 있다/ 천사의 얼굴이 악마의 얼굴로 변해갈 때가 있다”이다. 추락한 천사 얼굴의 반은 괴수의 눈과 이빨로 채워져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사와 악마로 번갈아 탈바꿈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분노의 천사’에선 천사가 나팔 대신 흉기를 들고 있다. 정 시인은 “마음에 꽂힌 칼보다/ 마음에 꽂힌 꽃 한 송이가/ 더 아프다”란 시구를 적어넣었다. 질투와 분노로 변한 사랑은 증오 자체보다 치명적이다.
조 신부는 천사와 부처를 겹쳐 놓기도 한다. 천사는 중생과 함께 아파하는 보살과 닮았다. ‘부처를 닮은 천사’ ‘관세음 천사’에 부처의 형상이 선연하다. 정 시인은 “연꽃을 손에 들고 종로거리를 걸어가는 천사를 보았는가”라고 읊조리며 종교적 배타성을 눅인다. 큰 사랑은 종교, 종파를 뛰어넘는다.
◇조광호 신부 ◇정호승 시인 |
조 신부는 정 시인이 몸담은 가톨릭 문우회의 지도 신부다. 둘은 함께 활동하며 수십 년간 영적 교분을 나눴다. 김남조 시인, 소설가 박완서씨 등 문인 300여명이 속한 문우회는 성지순례, 피정(일상의 번잡함을 피해 수도원, 성당에서 자신을 살피는 일)을 통해 마음 정화에 힘써왔다.
그림을 꾸미는 시는 원래 작고한 정채봉 시인 몫이었다. 정채봉 시인은 생전에 “신부님이 그림 그리고 제가 글을 써서 예쁜 책을 한 권 만듭시다”라고 제안했다. 당시 거친 작품을 그렸던 조 신부는 정채봉 시인의 고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 완곡히 거절했다. 몇 년 후 정 시인이 세상을 떠나자 조 신부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서 정채봉 시인과 가장 친했던 정호승 시인에게 글을 맡겼다.
조 신부는 “책을 정채봉 시인 영전에 바친다”, 정 시인은 “‘이 책을 통해 천사가 된 정채봉 형’을 만나게 돼 감사하다”며 정채봉 시인을 그리워했다.
심재천 기자 jayshim@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