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화가 문희자씨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천착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
문희자(76)씨는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정년 퇴임 이후 허무함과 해방감이 번갈아 찾아올 때, 눈부신 ‘그림의 세계’를 발견했다. 2000년 즈음 친구가 수강한 ‘예술의전당’ 미술 아카데미에 따라갔다. 처음엔 심심파적이었으나 캔버스에 색깔이 입혀지며 만물이 온전히 담기는 광경에 넋이 나갔다. 곧바로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해 그림을 배웠다. 수년간 ‘용맹정진’해 2005년 대한민국 회화대상전에 특선 입상했고 청도 국제미술제, 타워여류전(서양화)에 작품을 출품했다.
올해에는 ‘제1회 예술의전당 작가 스튜디오 전- 행복한 畵요일’(한가람미술관·2월12∼19일) 참여작가로 뽑혀 전시회를 갖는다. 미술평론가 2명과 예술의전당 큐레이터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그의 그림과 다른 화가 8명의 작품을 선별했다. 문씨는 ‘어머니와 아이들 1·2’ ‘어머니의 방’ ‘한국의 어머니’ 등 다섯 작품을 내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을 잇는 ‘관계’는 내게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번엔 어머니와 자식 관계를 유화로 표현해 봤어요. 아이들이 장성해도 안 보이는 탯줄로 엮여 있지요. 앞으로 여러 끈끈한 ‘관계’들을 소재 삼아 그려볼 생각이에요.”
기질이 예술 쪽에 닿아 있지 않으면 고희에 가까운 나이에 붓을 들어 왕성하게 활동하기 어렵다. 미(美)에 탐닉하는 이유는 그가 시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9년 펴낸 시집 ‘동회 가는 길’(민음사)에서 그는 이미 예술적 재능을 선보였다.
처음엔 남편 몰래 미술수업을 수강했다. “당신은 시를 계속 써야해”라며 떨떠름한 반응이 돌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남편은 음악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이강숙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이다. 이 총장은 아내의 그림을 보고 “평생 아이들 키우고 집안일 하느라 고생했는데 이제 내가 스폰서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문 화가는 그림 덕분에 새롭게 태어났다. 1968년 남편과 함께 미국유학을 떠났으나 삼남매를 키우고 남편을 내조하느라 자신의 꿈을 한구석으로 밀어둬야 했다. 남편과 자식들의 사회적 성공은 흐뭇했지만 ‘내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묵혀 뒀던 꿈을 꺼내 화폭에 옮겨 가꾸고 있다. “숨어 있는 색을 발견하는 눈이 생겼어요. 난초 잎에도 녹색 이외의 색깔들이 오묘하게 섞여 있습니다. 늦게나마 그림을 배우면서 이제껏 못 보던 세계를 보게 됐어요.”
글·사진 심재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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