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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흥사탑 사리기 ‘3대 의문’ 푼다

입력 : 2008-01-29 10:08:47 수정 : 2008-01-29 10: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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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오늘 국제학술대회 개최
목탑 건립시기·동북아 교류·백제 공예수준 논의
◇청동제 사리함의 명문◇진묘수형 패식◇운모 장식◇금실◇금제 귀걸이(왼쪽 위 부터 시계방향)
지난해 10월 발굴·공개된 충남 부여 왕흥사터 사리기는 세 가지 측면에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원통형 청동제사리함에 새겨진 명문 29자 등을 통한 왕흥사 목탑의 건립 시기와 목적, 사리 안치시설과 사리용기 배치 방식을 둘러싼 중국·일본과의 문화 교류, 운모장식 등 각종 공양품을 통해 본 백제 예술의 우수성 등이 그것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9일 국립부여박물관 강당에서 왕흥사 목탑터 발굴의 백제사·건축사적 의미를 살펴보고 향후 복원 정비 문제까지 다루는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발굴 초기 ‘백제왕 창(위덕왕의 생전 이름)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다’라고 해석된 명문 ‘百濟王昌爲亡王子/ 立刹’을 ‘백제왕 창이 세 왕자를 위해 탑을 세웠다’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입찰(立刹)에서 ‘찰’은 ‘탑기둥’을 뜻하는 황룡사 찰주(刹柱)본기처럼 ‘탑’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면서 “또한 ‘망왕자’(亡王子)’의 ‘망’자는 ‘三(삼)’자의 이체자(뜻과 음은 같지만 형태가 다른 글자)로 이는 중국 제나라의 방주타 묘지에서도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불교미술사를 전공한 김연수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장은 원통형 청동제 사리외합과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의 3중 구조로 된 사리기 중 청동제 사리함은 중국에 전래된 인도식 사리용기를 원형으로 삼아 6세기쯤 백제에서 특별히 제작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연수 과장은 “국내 처음 확인된 금제 사리병은 그 이후 사리병 역할을 했던 유리용기 기술이 도입되지 않아 과도기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왕흥사 목탑 기단의 구축 방식과 사리기 안치 형식은 동아시아 관점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일본 도후쿠대학의 사가와 마사토시 교수는 “심초석이 지하에 위치하고 사리장엄구로서의 기능이 중시된 공양품 구성 등은 6세기 말∼7세기 일본 목탑과 매우 유사한 형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양홍 연구원은 “심초석에 사리공을 마련하고 지붕 모양의 돌 뚜껑을 덮은 것은 북조∼수나라 때 보이는 사리석함이 이미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사리기와 함께 출토된 운모장식과 철제테, 금제귀걸이, 금실 등 공양품들은 매납된 절대 연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사비시기 백제 문물의 연대를 추정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단언했다. 이 교수는 “수준 높은 백제 금속공예기술의 우수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양품은 중국 유래설 등 부여 능산리 백제금동대향로를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명쾌한 자료”라고 덧붙였다.

송민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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