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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진씨는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의 취향에 맞는 여행 가이드 북이 필요하다”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슐랭 가이드’처럼 문화적·역사적 소양도 쌓을 수 있는 가이드북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허정호 기자 |
수백권 분량의 방대한 정보도 혀를 내두르게 하지만, 미슐랭 가이드의 최대 매력 중 하나는 역사·문화적 배경을 소상히 서술해 방문지에 대한 종합적인 식견을 갖출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또 현지의 명소를 나열해 놓고 ‘다 멋있다’는 식으로 쓰는 게 아니라 ‘꼭 가 볼 곳’, ‘가도 그만이고 안 가도 그만인 곳’ 등을 구분할 수 있도록 서술하고 있다.
얼마 전 국내에도 ‘한국의 미슐랭 가이드’를 표방한 여행 가이드북이 나왔다.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과 미술을 강의하고 있는 정장진(52)씨가 내놓은 ‘레 바캉스 가이드북 컬렉션’이 바로 그것.
프랑스 8대학에서 프랑스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정씨는 파리 유학 시절부터 여행 가이드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1988년부터 약 4년간 여름방학 때 관광 가이드를 했던 정씨는 유럽에 여행 온 한국인들 대부분이 ‘세계를 간다’, ‘저스트 고’(Just Go) 등 일본어 원판의 번역본을 들고 다니는 현실이 못마땅했다.
해외 여행자 수가 매년 급속히 늘어나고, 현지에서 가이드를 따라 다니는 패키지 여행 대신 스스로 여행을 계획하는 자유여행의 비중이 급속도로 높아지면서 가이드 북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국내에서 판매되는 가이드북은 외국에서 출간된 원판을 한국어로 번역한 게 많고, 한국인이 직접 펴낸 가이드북은 유럽과 일본 등 한국인이 많이 찾는 일부 여행지에 한정돼 있다.
정씨는 “그러다 보니 유럽인이나 일본인이 그들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그들의 취향에 맞게 편집한 가이드북을 들고 해외여행을 다녀야 했다”고 아쉬워했다. 한국인이 직접 쓴 가이드북도 현지 명소를 기계적·평면적으로 나열한 게 대부분이어서 점점 다양해지고 고급스러워지는 여행자의 기호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게 정씨의 지적이다.
1995년 귀국해 대학 강의에 나서는 한편 여행정보를 제작·판매하는 ‘여행 콘텐츠’ 사업도 병행하기 시작한 정씨는 가이드북을 직접 쓰기로 결심한다. 정씨는 “번역만 해서는 우리만의 콘텐츠를 확보할 수 없는 것 아니냐”며 “199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인터넷 열풍도 직접 가이드북을 제작하겠다고 맘먹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외국 책을 번역할 경우 온라인 서비스를 위한 콘텐츠로 재가공하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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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진씨가 펴낸 ‘레바캉스 가이드 북 컬렉션’. |
정씨가 5년 작업 끝에 올 초 펴낸 ‘레바캉스’ 1차분 14권을 보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미슐랭 가이드’를 벤치마킹했다. 각 도시의 명소와 레스토랑, 호텔 등 기본 정보를 소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 정치 상황, 문화, 축제, 각종 예술 정보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정씨는 “이제는 한국 여행객들도 유럽·일본 사람들처럼 문화 예술 테마 여행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며 “문화 예술 분야의 깊이 있는 정보를 원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 책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 여행자가 꼭 봐야 할 곳인지, 건너뛰어도 되는 곳인지 알 수 있게 되어 있다. 지도의 여행 명소에는 중요도에 따라 별점을 매겨 놓기도 했다.
특히 파리, 로마, 프라하, 이스탄불 편은 400여쪽에 온전히 한 도시를 소개하고 있다. 500쪽쯤 되는 책 한 권에 유럽 10여개국의 정보를 모두 집어넣은 다른 가이드북과는 깊이가 다르다.
1차분을 제작하는 데 5년 동안 연인원 30명이 40회 정도 현지 출장을 다녀왔고, 각 도서의 관광담당 부서에서 1200여 권의 안내책자를 제공받았다. 현재까지 10개국, 270여개 도시에 대한 가이드북을 제작한 정씨는 앞으로 5년간의 추가 작업을 거쳐 50여권의 책에 35개국, 500개 도시의 정보를 담을 예정이다. 총 10년에 걸쳐 전 세계 주요 여행지를 아우르는 가이드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정씨는 “여행은 감동과 지식을 전해주는 콘텐츠 산업”이라며 “ 한번 보고 버리는 게 아니라 형이 보고 동생에게, 아버지가 보고 아들에게 물려주어도 될 만한 여행 가이드북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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