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에 있던 장교들은 그들대로의 지하조직이 있었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육군본부 발간 ‘창군전사’ 265쪽)
창군전사 말고도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묘사한 책은 더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사망)씨는 1984년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서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에 가담한 경위를 이렇게 기록했다.
“신태양악극단이 1945년 2월9일 (만주군) 7연대에 들어가 공연을 했다. 광복군은 이 악극단에 잡역부를 가장한 공작원 이용기를 투입했다. 이씨는 부대 간부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박정희 중위, 신현준 대위와 만나는 데 성공했다. 이씨는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의 직인이 찍힌 광복군 임명장을 박 중위와 신 대위에게 줬다. 이래서 그들은 광복군 비밀요원이 됐다.” (‘육사 졸업생’ 26쪽)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밀광복군으로 묘사한 ‘광복군’(1967년), ‘창군전사’(1980년), ‘육사 졸업생’(1984년). 이 세 권의 책은 한 번 날조된 역사가 수정되지 않고 재생산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래 사진은 박정희를 처음으로 광복군으로 묘사한 소설 ‘광복군’. |
“대통령이란 그분의 위치가 위치니만큼 오해를 사기 쉬워 도에 넘칠 정도로 그분에 관한 것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직접 본인의 교열까지 받았다. 박정희 동지는 격무 속에서도 원고를 자세히 읽어 주셨으며, 몇 군데 고쳐 달라는 당부까지 하셨다.” 박씨는 ‘광복군’ 서문에 이렇게 썼다. 박정희 본인의 확인을 거쳤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92)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 비밀광복군설이 거짓임은 기존의 연구에서 이미 확인된 사실이다. “5·16 이후 반혁명사건으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박창암 전 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영만이 찾아왔다. 대뜸 ‘같이 박 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어느 지하운동 리더의 공적을 박 대통령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박창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1967년 박영만은 기어이 ‘광복군’을 출간했다. (…) 박영만은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운현 저 ‘실록 군인 박정희’ 118쪽)
박정희가 한때 광복군에 가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해방 이후의 일이다. 1945년 8월 이전에 그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결국 육군본부의 ‘창군전사’는 한 출세지향적 작가의 상상력이 빚은 허구를 그대로 인용한 셈이다. ‘창군전사’보다 4년 늦게 나온 ‘육사 졸업생’ 또한 같은 오류를 되풀이했다.
◇중국 옌지(延吉) 옌볜대학 내 항일무명영웅기념비. 일제와 싸우다 숨진 수많은 무명 항일투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하지만 날조·왜곡된 역사가 바로잡히지 않는 한 이들의 넋은 저세상에서도 편치 않을 것이다. |
왜곡 사례는 이뿐이 아니다. 독립군 탄압에 앞장선 간도특설대에 대해 “토벌작전에서 다대한 전과를 올려 용명을 떨쳤다”(35쪽)는 평가를 내리는가 하면, 일본군 중장까지 올랐다가 전후 전범으로 사형당한 홍사익 장군을 “몸은 일본군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민족의 장래를 위해 힘쓴 분”(80쪽)으로 묘사했다. 평화재향군인회 표명렬(67·예비역 준장) 상임대표는 “그런 잘못된 기록들이 고쳐지지 않은 채 몇십년 지나면 사실로 굳어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개탄했다.
특별취재팀=류순열·김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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