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와 정치인 덕목 전혀 다르고
이력에 오점만 남길 가능성 높아
하루빨리 명확한 입장 내놓아야
대통령 권한대행 한덕수 국무총리를 처음 만난 것은 김대중정부 출범 첫해인 1998년 여름 그가 청한 저녁식사 자리에서였다. 당시 한 권한대행은 외교통상부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이었고, 필자는 출입기자였다. 그때 모든 자료에 그의 고향은 서울로 기록돼 있었다. 필자가 식사 자리에서 “고향은 서울이죠”라고 묻자 그는 정색하며 자신의 고향을 “전북 전주”라고 밝혀 순간 당황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970년 행정고시 합격 후 김영삼정부 때까지 줄곧 서울 출신이었던 그가 김대중정부가 출범하자 전주 출신이라고 고향을 바꾼 것은 두고두고 논란이 된다.
국회의 탄핵소추로 노무현 전 대통령 직무가 정지됐던 2004년.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었던 고건 전 총리에게 총리를 보좌하는 국무조정실장이 “시중에 ‘탄핵이 인용되면 총리님이 대선에 나올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얘기가 있습니다”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이에 고 전 총리는 “절대 안 될 일이다. 위기관리를 끝까지 책임지는 게 내 소명”이라고 일축했다. 이때 고 대행에게 ‘고건 대망론’을 전한 국무조정실장이 바로 한 대행이다. 한 대행 성격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두 개의 일화다.

한 대행은 고 전 총리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관료로 꼽힌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거쳐 미국 하버드대에서 공부한 그는 빼어난 실력과 전문성을 갖췄다. 또한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는 합리적이고 신중한 처신이 돋보인다. 보수·진보를 넘나들며 5개 정부에서 중용되고 두 차례나 총리를 지낼 수 있었던 배경이다.
6·3대선이 50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 국민의힘에서 ‘한덕수 차출론’이 확산하고 있다. 국힘 주자들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와의 대결에서 크게 뒤지고, 미국발 통상 마찰이 최대 이슈로 부상하면서 ‘경제통’ ‘미국통’이라는 한 대행의 경쟁력이 부각됐기 때문이다. 13일에는 친윤(친윤석열)계를 중심으로 국힘 의원 50여명이 한 대행의 출마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려다 당 지도부 만류로 보류했다. 14일 발표된 리얼미터 선호도 조사에서 그는 8.6%를 기록해 만만치 않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돌연 출마 의사를 접은 것도 친윤계의 한 대행 옹립 움직임에 반발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 대행의 애매모호한 처신은 그의 차출설을 부추기고 있다. 한 대행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과 함께 제게 부여된 마지막 소명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차출론에 에둘러 선을 그은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명확한 불출마 선언도 아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 대행과 전화로 통상문제 등을 논의하며 대선 출마 여부를 물었는데도 한 대행은 즉답을 하지 않았다.
한 대행이 정치를 시작해도 국힘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할 것 같지는 않다. 국힘과는 거리를 두고 무소속으로 출발해 국힘 후보와 단일화하는 방안이 검토된다는 전언이다. 이른바 ‘반명(반이재명) 빅텐트’를 치겠다는 구상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처음 정치판에 들어올 때도 한때 이런 방식이 거론됐었다.
한 대행 출마론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다. 조기 대선을 관리해야 한다는 심판이 경기에 뛰어들 생각을 한다고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정치인은 관료와는 전혀 다른 덕목을 요구한다. 그가 국무조정실장으로 보좌했던 고 전 총리, 대선 행보에 나선 지 20여일 만에 중도하차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검사 출신인 윤 전 대통령도 대선에서는 운좋게 승리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며 결국 임기 중간에 파면되는 비극을 맞지 않았는가.
자기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뒤 그 명성에 힘입어 정치권에 들어왔으나, 상처만 입고 스러져간 인물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한 대행은 전형적인 관료다. 그가 정치권에 들어와 숱한 난국을 돌파해 나가고 상대방의 거친 공격을 견뎌낼지 의문이다. 그가 권한대행 업무를 무난하게 마치고 퇴장하면 그는 관록 있는 원로로 남을 수 있다. 섣불리 정치권에 발을 담갔다가 그의 이력에 커다란 오점이 생기는 것은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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