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보복… 등 돌린 동료… 내부고발자 ‘고통뿐인 정의’ “동료들의 따돌림은 조직의 강요로 시작된 게 아니었어요. 조직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의식해서 스스로 한 걸 알고 심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취재진이 학교, 직장, 군대 등의 내부고발자를 심층취재한 결과 대부분 각종 회유와 협박, 따돌림 등 ‘유무형’의 보복을 당해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같이 생활하던 동료들의 ‘자발적 외면’이 가장 심한 정신적 상처였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달 28일 고려대에서 만난 A(여)씨는 “조직의 벽이 높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이 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A씨는 얼마 전 ‘지도교수로부터 상습적인 성희롱·성추행을 당했다’며 교내 양성평등위원회 등에 신고했다. A씨는 “얼마 전 고민 끝에 다른 학생에게 고충을 털어놨는데, 그 사실을 알게 된 교수가 ‘A와 연락하는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학생들을 협박했다. 그 말을 듣고 스트레스를 받아 하혈까지 했다”며 “겁이 났지만 부당함을 계속 참다가는 내 인생이 갈기갈기 찢길 것만 같아 모든 걸 감수하고 밝히기로 했다”고 말했다. 함께하자는 뜻을 밝혔던 동료 몇몇은 고발 직전에 포기했지만 A씨는 ‘끝까지 가보기로’ 결심했다.
저항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해당 교수는 “모두 악의적인 거짓말”이라고 반박했다. 양측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꼭 이기길 바란다’고 응원하던 동료들이 서서히 등을 돌렸다.
동료들의 외면은 그 어떤 상처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이제 그만해라. 절대 못 이긴다”는 문자메시지가 수시로 날아왔다. 한 동료는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A가 오히려 교수를 유혹하고 성희롱했다”는 교수 측 입장이 담긴 보도자료를 돌리며 소란을 피웠다. A씨는 “동료들이 침묵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적극적으로 교수 편에 서서 나를 몰아붙이는 걸 보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너무 힘들어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결국 진실이 밝혀질 것이란 생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고 있다”며 “늘 심장이 두근거리고 신변에 위협이 생길까 두렵다”고 말했다.
내부고발자 왕따 지시 공문 정국정씨가 직장 상사의 비리를 고발하자 회사는 직원들에게 “정씨를 왕따시키라”는 내용의 이메일을 발송했다. 정씨에게서 사내망 아이디를 회수했으니 회사 컴퓨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고, 이를 어긴 직원들에게는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
A씨의 저항이 ‘현재진행형’이라면 정국정(49)씨는 이미 오래전 조직에 반기를 든 경우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에게 가해지는 고통은 끊이지 않고 있다.
1996년 LG전자에서 근무하던 정씨는 우연히 회사의 납품비리를 알게 돼 본사 감사실에 제보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회사 측은 창가 쪽에 책상을 주더니 얼마 후 책상마저 빼내고 ‘창가에 서서 근무하라’고 지시했다. 상사는 ‘밥벌레’라는 폭언을 쏟아놨고, 동료 50여명에게는 “정씨를 따돌리라”는 내용의 메일이 전송됐다.
이후 동료들은 정씨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무도 말 걸지 않는 회사에서 ‘유령처럼’ 지내던 정씨는 1999년 회사에서 쓰러진 뒤 입원했다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이후 우울증 증세를 보여 ‘직장 내 왕따’로 인한 정신적 피해로 최초로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지만, 해고무효소송은 13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씨는 “동료들이 법정에서 ‘정 대리는 일을 안 했다’고 진술하는 걸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번도 더 했다”며 “인생의 파멸이 별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했을 뿐인데 일순간 배신자로 전락했다”면서 “내부고발자의 삶이 너무 가혹한 것 같다”며 씁쓸해 했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습니다. 익명으로 나가도 그들은 다 알 것 같아요.”
군 복무 시절 소속 부대의 비리를 고발했다가 제대할 때까지 상사들로부터 회유와 협박에 시달렸던 B씨는 예정된 인터뷰를 전날 갑자기 취소했다. 그는 “다시 만날 사람들도 아니고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불안하다. 이게 내부고발자들의 심경인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내 왔다.
고등학생 때 동아리 선배들의 폭력을 학교에 알렸다가 ‘왕따’를 당했던 C(여)씨는 “10년이 지났지만 요즘도 학교 근처만 가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성격도 소극적으로 변했다”고 털어놨다.
취재진이 만난 내부고발자들은 저마다 ‘보복’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이유 없이 불안해지거나 악몽을 꾸고, 경미한 우울증 증세까지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고발의 과정이나 내용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두려움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김유나·조성호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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