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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신천 학살사건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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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10-18 21:05:11 수정 : 2013-10-18 23: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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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년 전 황해도 신천(信川)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북한은 1950년 9월28일 서울을 탈환한 미군이 38선을 넘어와 10월17일부터 12월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5383명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1958년 ‘신천박물관’을 지어 반미교양기지로 활용하고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피카소는 이를 소재로 ‘조선에서의 학살’(1951)을 그린다. 과연 신천학살사건의 진실은 뭘까.

10월1일 국군이 38선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3일 신천에서 반공의거가 일어났다. 공산 치하에 숨어 살던 반공청년들이 들고일어나 퇴각하는 인민군과 싸워 국군의 북진을 돕는다. 기독청년 등 309명이 전사했다. 5막에 걸쳐 진행된 신천사건의 제1막이다.

제2막은 퇴각하던 인민군 패잔부대와 공산당 간부들이 태극기가 꽂혀 있는 신천을 진압하는 와중에 벌어지는 살육을 일컫는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소개된 방공호와 우물 등에 수십 구의 시체가 쌓여 있는 바로 그 장면이다.

제3막은 공산 진영에 가족을 학살당한 의거군이 자치회로 개편된 후 극렬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노동당, 민청, 여맹, 농맹, 직맹 등 공산당 간부들과 그 가족들을 처단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제4막은 인근 구월산으로 피해 들어간 인민군 패잔병과 남은 노동당원들이 빨치산을 조직해 다시 양민학살에 나서고, 이를 진압하려는 자치회와 또 한차례 충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대량 살상극이다.

제5막은 후퇴했던 인민군이 중공군의 참전과 함께 신천을 재장악하면서 일어난 학살극이다. 구금되었던 공산당원과 그 가족들은 의거군에 처형되고, 미처 철수하지 못한 반공무장대 가족들이 다시 한번 빨치산들에게 학살당한다.

신천사건과 미군은 아무 관련이 없다. 북한이 신천학살 주범으로 지목한 미군 해리스 중위는 당시 신천에 2시간 머물며 자치회와 국군에 치안을 넘겨주고 재령을 거쳐 평양으로 북진했다. 북한이 신천학살 주범을 미군에 뒤집어씌운 건 공산치하에서 벌어진 ‘반공의거’를 감추기 위해서다. 좌우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신천 주민들의 명복을 빈다.

조정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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