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검만 하는 ‘반쪽 검시’ 회의 느껴 사건 현장은 ‘증거의 바다’이다. 범죄 현장 어딘가에는 사건 실마리를 풀 단서가 남는다. 변사 사건에서는 현장과 더불어 시체에서 단서를 찾아야 한다. 시신이 몸으로 쓴 유서를 읽어내는 전문가는 법의학자다. 그러나 국내 법의학자는 50명에 불과하다. 한 해 5000건이 넘는 부검을 하기도 벅차서 법의학자가 변사사건 현장에 직접 나가는 일은 아주 드물다. 이 때문에 경찰은 간호학·병리학 전공 출신의 경찰검시관을 늘려 그 빈자리를 채우려고 하지만 법의학계는 “안될 일”이라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현재 국내 법의학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22명, 전국 의과대학 법의학교실에 19명, 민간 법의학의원에 9명이 소속돼 있다.
국과수 중앙법의학센터 양경무 법의관은 “현장에 직접 나가 검안하는 것은 법의관의 꿈이자 숙제”라며 “그러나 현실은 부검하다가 의문점이 생기거나 확인이 필요할 때나 현장에 나가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라고 아쉬워했다.
법의관들이 현장에 나가려면 인원이 확충돼야 하지만 정부는 최소 5급 사무관으로 임용되는 법의관을 늘리는 데 난색을 표한다.
결국 부검만 하는 반쪽짜리 검시에 회의를 느낀 법의관들은 국과수에서 나와 민간 법의학의원을 열고 있다. 현재 민간 법의학연구소는 서울 2곳, 부산·울산 2곳, 대구 1곳 등 전국에 총 5곳으로, 모두 9명의 법의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경찰 연락을 받고 변사사건 현장에 나가 검안을 하고, 간혹 보험사나 일반인들로부터 사인 규명 의뢰를 받기도 한다.
한국법의학 서울의원 전석훈 원장은 “부산과 울산은 변사사건이 접수되면 경찰이 무조건 민간 법의학의원에 연락해 변사의 90%를 법의학전문의사가 검시하는 이상적인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서울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경찰도 “현장에서 시신을 검안해야 하는데 나올 의사가 없으니 병원으로 시신을 싣고 간다”며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사망 여부만 판단하니 시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법의학적 단서는 다 놓치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전 원장은 “경찰과 의사 눈에는 병사처럼 보였지만 뒤늦게 사건이 푹푹 뜬다”며 “그게 바로 치과 모녀 살인사건, 고대 여학생 피살사건”이라고 꼬집었다.
정부가 법의관을 확충해주지 않자 경찰은 2005년 ‘경찰검시관’을 7·9급 일반직으로 채용해 16개 지방경찰청에 배치했다. 간호학·임상병리학·생물학을 전공한 경찰검시관은 변사사건 현장에서 시신의 상태와 주변상황을 살펴 경찰과 부검의사에게 정보를 준다.
경찰은 2016년까지 검시관을 144명까지 늘려 장기적으로 모든 변사사건에 출동시키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법의학자들은 검시관이라는 명칭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검시관(Coroner)은 원래 검시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지닌 검사나 판사 등을 일컫는 명칭인데 경찰이 검시보조요원에 그릇된 명찰을 붙여 국민 혼동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애초 검시관을 전원 국과수로 파견, 국과수 현장 조사요원으로 활용하려던 구상이 변질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법의학계에선 “이런 식이면 검시관 교육조차 협조할 수 없다”는 강경한 목소리가 나온다. 이에 경찰은 최근 검시관이라는 명칭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전국 지방경찰청 소속 과학수사요원들이 지난해 6월 전북 전주의 한 야산에서 ‘매장시체 발굴 및 변사자 사후 경과시간 추정기법’ 교육을 받고 있다. 경찰은 검시업무를 보조할 검시관을 채용해 활용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
특별기획취재팀=박성준·김수미·오현태 기자 specia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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