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저녁 대전 카이스트(KAIST) 내 유룡(60·사진) 화학과 특훈교수의 연구실이 있는 E6-4호 건물.
건물 3층 대회의실에서 노벨화학상 수상자 발표 생중계를 숨죽여 지켜보던 학생과 취재진은 형광 현미경을 개발한 에릭 베칙 등 3명의 공동 수상자가 발표되자 탄식을 토해냈다.
고은 시인의 문학상 수상 여부가 여러 차례 국민들의 기대감을 부풀게 했지만 한국인으로는 처음 유 교수를 화학상 수상 예측 인물에 올려 어느 때보다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물 1층 교수실에서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던 유 교수는 ‘애초부터 확률은 0%’라며 담담한 모습이었다.
그는 “처음은 어렵다. 서너 차례 이름이 올라야 기대할 수 있다”면서 “우리나라 과학이 드디어 노벨상급이 됐다는 점에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오히려 주변을 다독였다.
지난 7일 3명이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하는 등 22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과의 차이점을 묻자 ‘시간과 연구 환경’을 끄집어냈다.
유 교수는 “턱없이 짧은 연구투자 역사를 감안할 때 미국·일본과의 비교는 어불성설”이라며 “본격적인 국내 투자는 20여년에 불과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연구 환경에 대해 미국식과 일본식의 장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가 바라본 미국식 연구 환경은 당대의 연구자 한 명이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훌륭한 인재와 함께 연구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경우다. 반면 일본식은 ‘한 우물 연구’로 연구 성과가 공유되고 꾸준히 이어지는 게 특징이다. 교수와 부교수, 조교수 등이 함께 연구하고 성과를 공유하며 선임 교수가 은퇴하면 후임 교수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연구를 지속하면서 연구실 고유의 작품을 낸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 가운데 미국식을 따르고 있지만, 우수 인재가 찾지 않으면서 미국식 장점조차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교수가 은퇴하면 대부분 실험실이 분해되다보니 일본처럼 연구의 깊이 역시 부족하다는 진단도 곁들였다.
유 교수는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연구하고 시대에 발맞춰 빠르게 대응하는 미국식의 장점도, 대를 이어 연구를 진행하는 일본식의 장점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연구자들도 한 우물을 파지 않고 연구비가 집중되는 인기 과제에만 몰린다면 노벨상은 요원한 숙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30년 넘게 나노다공성 탄소합성 연구에 매진한 유 교수는 나노다공성물질을 거푸집으로 이용해 나노구조의 새로운 물질을 합성하는 방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어 이를 석유화학공정 촉매제인 제올라이트에 적용, 크고 작은 나노 구멍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2010년 제올라이트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브렉상’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사이언스가 선정한 전 세계 10대 과학성과에 선정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나노다공성물질의 산업화가 활성화되면 이 분야에서 독보적 지위를 확립한 유 교수의 노벨상 수상도 충분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대전=임정재 기자 jjim61@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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