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바다가 유혹하는 거제도 여행/겹겹이 쌓인 바위층...억겁의 시간 파도가 빚은 신선대/“자그락 자그락”... 몽돌해변의 합창/바다의 금강산, 해금강 마음을 빼앗고
그리스 산토리니 이아마을 언덕에 선 듯하다. 하늘과 바다, 건물 지붕까지 인디고 블루와 울트라 마린 같은 짙은 파랑으로 채색된 동화 같은 풍경. 지중해에 쪽빛 물감을 가득 풀어놓은 그리스 신들이 아주 오래전 먼 여행길에 올라 거제도에도 몰래 다녀갔나 보다. 이름마저 신선대라니. 이런 우연히 있나. 긴 겨울의 터널을 지나 남풍이 불기 시작하는 거제 바다가 신비로운 남색으로 칠해졌다. 그리고 파도가 조각한 장엄한 해식절벽이 해안선을 따라 겹겹이 이어지는 풍경은 산토리니 혹은 이탈리아 친퀘테레를 뛰어넘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겨울 거제바다, 블루의 유혹
몇 해 전 겨울 그리스 산토리니에 다녀온 뒤 블루에 푹 빠졌다. 옷이며 소파 쿠션이며 모두 같은 색이다. 심지어 얼마 전 산토리니로 꾸미겠다며 커튼까지 인디고 블루로 바꿔 버렸다. 묘한 매력을 지닌 색이다.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우울하던 기분이 어느새 사라진다. 마치 산토리니를 여행하는 착각을 부르기 때문일까.
지금은 합성염료를 사용하지만 인디고 블루는 원래 자연이 선사한 색이다. 쪽빛과 남색은 같은 말로 쪽의 한자어가 ‘남(藍)’이다. 쪽은 이집트에서 3300여년 전부터 염색 원료로 사용한 식물로 쪽에 담긴 물질 ‘인디칸’이 발효되면서 ‘인디고’라는 푸른 색소가 얻어진다. 쪽빛 하늘, 쪽빛 바다로 불리는 이유가 다 자연의 색이기 때문이다. 그런 쪽빛을 제대로 드러내는 때는 겨울이다. 공기가 맑고 투명해 바다는 하늘색을 온전하게 담고 깊은 바다색이 더해지면서 완벽한 쪽빛을 완성한다. 어느덧 2월. 겨울이 가기 전 문득 푸른 바다가 그리워 남쪽 끝으로 달려간다.
7시간가량 운전해 머리가 몽롱해질 무렵 통영을 거쳐 경남 거제로 들어서니 오후 4시. 곧 해가 질 듯해 신선대를 향해 14번국도 해안도로를 따라간다. 쪽빛 바다가 밀당하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풍경들. 자꾸 시선을 빼앗기지만 롤러코스터처럼 반복되는 아찔한 내리막 급커브와 씨름해야 하니 잠시 감상은 접어두고 안전운전에 집중해야 한다. 하얀색과 빨간색으로 꾸민 신선대 글자 조형물이 설치된 곳에 오르면 신선대가 잘 보인다. 정말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처럼 신기하다. 바다를 향해 단층이 오른쪽으로 삐죽 튀어 나왔는데 가장 아래 단층부터 차례로 길이가 짧아지며 맨 위에는 봉우리가 솟았다. 멀리서 보면 선비의 갓을 닮아 갓바위라고 부르며 높은 관직에 오르려는 이들이 이곳에서 제를 지냈다는 얘기가 전해진단다. 안내판에 적힌 이런 설명이 좀 올드해 신비감을 깨는 것 같다. 그냥 보는 순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장엄한 절벽이다.
신선대를 둘러싼 하늘과 바다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쪽빛이다. 말로 설명하기 쉽지 않은 색감은 묘하고 신비롭다. 햇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져 사진을 찍을 때마다 색감이 끊임없이 바뀐다. 몽돌이 깔린 작은 해변이 낭만을 더하고 해식절벽이 농도를 달리하며 멀어지는 풍경이 압권이다. 산토리니 이아마을 사람들이 와 보면 엄지를 치켜세울 것 같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 신선대에 서면 쪽빛 바다 품에 안긴다. 신선대 맨 윗 봉우리는 분리된 바위인데 멀리서는 한 덩어리로 겹쳐 보인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피사체의 앵글을 잡으면 인생샷이 얻어진다.
#억겁의 시간 파도가 빚은 몽돌해변
거제여행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것이 몽돌이다. 다른 해변과 달리 모래는 거의 없고 대부분 몽돌로 해변이 뒤덮인 점이 이채롭다. 다양한 크기와 색을 지닌 몽돌들. 억겁의 시간 동안 파도에 굴려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동글동글하게 조각됐다. 거제의 해안선을 따라 크고 작은 몽돌해변이 계속 나타나는데 북쪽 거가대교 인근 농소몽돌에서 시작해 남쪽 끝 여차몽돌해변까지 이어진다. 거제도에서 저도와 죽도를 거쳐 해저터널로 가덕도까지 이어지는 거가대교를 보려면 유호전망대에 오르면 된다. 섬들을 연결하며 바다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하얀색 다리는 다행히 아름다운 디자인 덕분에 자연속에 잘 녹아들어 있다. 곡선 다이아몬드형의 주탑이 인상적이다.
궁농항을 끼고 있는 농소몽돌은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진 해변과 인디고 블루, 에메랄드색을 섞어 놓은 듯한 바다색이 인상적이다.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한 바다와 리조트 건물이 어우러져 마치 남태평양 산호초섬 휴양지같다. 관포항을 지나면 두모몽돌로 에메랄드색이 좀 더 짙다. 앞바다에 이수도가 아름답게 떠 있고 오른쪽 절벽을 따라 바다 위에 해안산책로가 놓여 조용히 사색하며 걷기 좋다. 여기서도 멀리 거가대교가 보인다.
몽돌해변을 따라가는 길은 겨울 별미 대구로 유명한 외포항과 해금강·외도·지심도를 여행하는 유람선이 출발하는 장승포항, 지세포항 등 어촌마을이 계속 등장해 지루할 틈이 없다. 와현모래숲해수욕장과 구조라해수욕장을 지나면 망치항이 자리 잡은 망치몽돌로 아름다운 작은 섬 윤돌도가 매력적이다.
이어 급경사 커브길을 여러 차레 지나면 가장 유명한 학동흑진주몽돌해변이다. 중학생 3명이 몽돌로 물수제비 경연을 펼치고 멀리 던지기도 겨룬다. 몽돌은 가져갈 수 없지만 바다를 향해서는 마음껏 던질 수 있다. 동심으로 돌아가 팔이 빠져라 힘껏 멀리 던져본다. 신선대 가는 길에 만나는 함목몽돌과 다대항을 지나 여차몽돌까지 가면 몽돌해변 여행을 완성한다. 인근 여차홍포전망대에 오르면 누렁섬, 소병대도, 쥐섬을 넘어 멀리 가왕도, 매물도, 소매물도까지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를 수놓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역시 아름다운 한려해상국립공원이다.
#바다의 금강산, 마음을 훔치다
한 달 살이를 하라면 거제를 선택하겠다. 구석구석 다녀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행지가 널렸다. 이동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에 최소한 3일 이상 여유 있게 일정을 잡아야 거제의 매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신선대 인근 도장포에서는 바람의 언덕을 만난다. 주차한 차가 요동칠 정도로 강풍이 어마어마해 바람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실감난다. 언덕 위의 예쁜 풍차 때문에 인기가 높은데 가장 뷰가 잘 나오는 곳은 도장포로 내려가는 길 입구에 있는 베이커리 카페 테라스다. 항구와 쪽빛바다, 예쁜 풍차가 서 있는 언덕을 인물 뒤에 모두 담을 수 있다.
이제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으로 떠난다. 우제봉 전망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0분 정도 다소 가파른 산책로를 올라야 한다. 하지만 그만큼 보상도 크다. 전망대에 오르자 눈앞에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신비한 해금강 풍경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4개의 절벽이 모여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섬은 왼쪽 사자바위에서 오른쪽 촛대바위까지 신이 빚은 듯 완벽하다. 직접 보니 해금강이라는 이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전망대 왼쪽 액자 포토존이 인기다. 이곳에 앉으면 정확하게 액자 안에 담기는 해금강과 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
해금강의 진정한 매력은 유람선을 타고 십자동굴과 촛대바위를 가까이서 봐야 한단다. 해금강의 북, 동, 남쪽으로 수로가 뚫려 있고 하늘에서 보면 십자 모양인데 유람선을 타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보통 해금강과 외도를 묶어서 여행하는 해금강유람선은 장승포, 지세포, 와현, 도장포, 다대항 등에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늘면서 지난달 13일부터 오는 12일까지 운항이 일시 중단됐다. 꽃피는 따뜻한 봄날에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거제=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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