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자료 망라 격동기 유럽 ‘생생’
뤼시앵 페브르·앙리 장 마르탱 지음/강주헌·배영란 옮김/돌베개/3만8000원 |
15세기 중반부터 활판인쇄가 활발해졌으나, 책에 페이지를 매기는 관행은 1499년에 시작됐으며 16세기 초가 돼서야 보편화됐다. 또 인쇄물에 페이지를 매기는 것은 원래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만들던 장인들이 작업을 하며 기준점을 삼기 위해서 생겨났다. 책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절지 묶음이 동일한 장수로 이뤄지지 않았고, 각각의 낱장도 제각각 끼워져 있었기 때문에 제본공의 작업은 무척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쇄업자들은 각각의 분책마다 알파벳 문자나 숫자를 우측 하단에 인쇄해 각 낱장을 구분시켜 주었다.
신간 ‘책의 탄생’은 활판인쇄술과 책이 15, 16세기 사회변화를 추동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나 설명하며 이같이 흥미로운 내용들을 소개한다. ‘책의 탄생’은 책에 관한 책 중 최고의 고전으로 불리는 명저로, 1958년 프랑스에서 초판이 출간된 이후 한국어판으로는 56년 만에 처음 소개된다. 앙리 베르가 기획한 ‘인류의 진화’ 총서 중 49권이기도한 이 책은 아날학파를 창시한 프랑스의 근대사학자 뤼시앵 페브르와 그의 제자인 문헌사학자 앙리 장 마르탱이 썼다. ‘아날’은 연보를 뜻하는데, 정치 중심의 근대 전통사학을 비판하며 인간의 삶에 관한 모든 학문 분야를 통합해 생활사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한 게 아날학파다.
‘책은 어떻게 지식의 혁명과 사상의 전파를 이끌었는가’라는 부제대로 ‘책의 탄생’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책의 출현이 가져온 사회경제적 변화다. 뤼시앵 페브르는 “인쇄된 책이 세상을 지배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라고 썼다.
최초의 성경 인쇄본으로 꼽히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돌베개 제공 |
책은 유럽 각국의 언어가 형성되고 자리 잡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저자들은 설명한다. 책이 등장하며 라틴어로 대표되는 문어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고, 구어체와 통속어 사용이 급격히 늘어났다. 가능한 한 폭넓은 고객층을 확보하려던 출판업자들은 가급적 통속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책의 탄생’의 저자들은 인쇄술과 책의 등장이 15, 16세기 가장 강력한 사회변혁의 원동력이었다고 강조한다. 당시 교회를 비판한 ‘불온서적’을 도처에 퍼뜨린 서적행상인들은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주체였다. 그림은 파리의 서적행상. 돌베개 제공 |
이처럼 당시 책은 역사의 주체이자 변혁의 요인이었다. 앙리 장 마르탱은 “책은 사람이 갖고 있는 신념을 눈에 보이는 실체로 보여주고, 책을 소유함으로써 그 사람의 생각은 물리적으로 구체화된다”며 “책에는 망설이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엮어 가담시켜 주는 힘이 있다”고 했다. 전자책과 영상매체, 그리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2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책이나 벽보라고 한다면, 저자의 이 같은 언명은 이 책의 무대에서 500여년이 지난 현재에도 정확히 들어맞을 것이다.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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