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안목으로 존경을 받은 오세창(왼쪽 다섯번째)과 근대기 대수장가의 모범으로 꼽히는 전형필(왼쪽 여섯번째)이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
전형필의 존재감이 워낙에 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비슷한 길을 걸었던 동시대의 대수장가들이 있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였던 위창 오세창과 송은 이병직이 그들이다. 전형필과 동시대를 산 그들의 이름을 한번 떠올려보는 것도 특별전을 감상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지 않을까. 책 ‘미술품 컬렉터들’(김상엽 지음, 돌베개)를 따라 두 사람을 만나보자.
◆간송의 조언자가 된 최고의 감식안
전형필의 문화재 수집에서 가장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했던 사람이 오세창이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간송미술관의 유물들은 그의 감정을 거쳤다고 한다. 전형필 뿐만 아니라 근대기 주요 한국인 수장가들 중에는 오세창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화상이자 전시기획자였던 오봉빈, 도자기 수집가로 유명한 박병래 등이 오세창과 교유하며 안목을 빌렸다.
그는 예술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권위였다. “고서화 감식안에 있어서 제1인자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서화계의 중심적 원로”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런 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업적으로 꼽히는 ‘근역서화징’, ‘근역인수’의 집필이다.
‘근역서화징’은 신라의 솔거부터 근대의 서화가 정대유까지 서예가,화가, 서화가 등 1117명의 인적사항, 활동, 장기를 정리한 저술이다. 한국 미술사를 ‘삼국 및 통일신라’, ‘고려’, ‘조선 상·중·하’로 구분해, ‘술이부작’( 述而不作·기록하되 마음대로 짓지 않는다), ‘무징불신’(無徵不信·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의 역사서술 전통에 따라 집필했다. ‘근역인수’에는 자신의 인영(印影·도장을 찍은 흔적) 225개를 포함해 조선, 근대의 인물 856명의 인장을 모았다. 역대 인물들의 필적을 모은 ‘근역서휘’, 이름 높은 인물들의 편지를 모은 ‘근묵’, 고려말과 조선의 작가, 작품을 수록한 ‘근역화휘’ 등은 지금도 서화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이병직이 자신의 소장품인 ‘삼국유사’을 들고 있는 모습. |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오세창의 고서를 모은 ‘위창문고’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최초의 개인문고다. 1947년에 설치됐고, 1972년 개인문고로 지정됐다. 오세창이 소장했던 1124종 3489책으로 이뤄져 있는데 철학·종교, 역사·지지(地誌), 어학·문학 등 다방면의 전적들을 포함하고 있다.
◆대수장가·교육자가 된 조선의 마지막 내시
이병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내시 중 한 명이었다. 7살 때 사고로 “‘사내’를 잃은 뒤” 강원도 홍천의 7000석꾼 내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고 한다.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유재현의 손자뻘로 내시들의 세계에서 중요한 계보를 이른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혔다.
그의 재력은 20대부터 유명해 최창학, 박흥식, 전형필, 김성수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부자들로 꼽혔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재 수집에 나서 대수장가의 반열에 오르는데, 일제강점기 유일한 미술품 경매회사였던 경성미술구락부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두 번의 경매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그가 수장했던 김두량의 ‘월야산수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조속의 ‘매조도’는 간송미술관에, 장승업의 ‘홍백매십선병풍’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되어 있다. 이병직은 6·25전쟁과 이어진 혼란기의 와중에도 현전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판본인 ‘삼국유사’(국보 306호)를 잘 지켜 지금도 그의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병직은 문화재 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재정난에 허덕이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1940년에 인수한 전형필과 비슷한 면모다. 1937년 효촌간이학교에 교지 및 건물을 기증했고, 1939년에는 양주중학교 설립 기금으로 큰 돈을 쾌척했다. 1946년, 1964년에도 기금과 땅을 기부했다. 그가 경매회를 열어 소장품을 처분한 것도 이들 학교에 희사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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