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는 만물을 만들었지만 이름은 붙이지 않았습니다. 자연 그 자체가 곧 추상인 셈이지요. 저는 단지 자연의 여러 현상들에서 발견하고 선택하고, 이를 다시 고치고 보탤 뿐입니다.”
대표적인 단색화 작가 권영우(1926∼2013) 개인전 ‘Kwon Young-Woo’가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에서는 권영우의 상징적 작품인 백색 한지 작품들과 함께,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색채 한지 작품들이 나온다.
전시장 1층에서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들이 바로 색채 한지 작품. 1989년 파리에서 귀국한 직후의 작품들이다. 먹색의 컬러감이 분명한데, 작가가 그은 선과 형태의 테두리는 흩어지지 않고 단정하다. 서양의 과슈(gouache)와 동양의 먹을 혼합해 새로운 재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획마다 각각 다른 비율로 혼합하면서 미묘한 색감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먹은 번지면서 물기와 함께 확산해 가는 반면, 불투명 수성 안료인 과슈는 스스로 응결한다. 서로 역작용하는 두 재료의 특성으로 인해 화면엔 잔잔한 여운이 흐른다. 작가는 “남들은 과슈다, 먹이다 구별을 하는데 나는 그런 구별 자체를 안 하고, 그냥 검정색이다 하고 여긴다”고 했다고 한다.
2층에서 만나는 1980년대 파리 거주 시기 한지 작품들은 권영우의 유명한 개성적 작품들로 아우라를 풍긴다. 권영우의 파리 시기 대표작은 올해 세계적 미술관인 프랑스 퐁피두센터에 소장되기도 했다. 동양적 재료로 서구 사회 한복판에서 현대적 조형언어를 구축해낸 힘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또 패널에 한지를 겹쳐 발라 기하학적 형상을 구현한 작품들에서는 한지를 놓지 않은 그의 집요함, 부단한 실험의지가 담겨있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조르주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papier colle)’나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e)’ 시리즈가 연상되기도 한다. 한지를 이용한 세련되고 현대적인 백색 화면에는 전후 추상의 수용에 직면해 전통의 현대화라는 맥락에서 당대의 시대적 과업을 이행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과 열정이 담겨있다. 그는 “전통 문제만 하더라도 이것은 그 자체를 길이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보다 새롭게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동양화 서양화 구분 자체를 넘어서는 작가로 스스로 이정표가 됐다. 내년 1월30일까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