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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예술가 백남준 탄생 90주년 ‘1년 내내 축제’

입력 : 2022-04-06 09:41:32 수정 : 2022-04-06 18: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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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작품 ‘칭기즈 칸의 복권’과 백남준.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떠난지 14년이 흘렀지만 아직 후임자가 없기에, 그의 빈 자리는 여전히 크다. ‘비디오아티스트의 창시자’, ‘현대미술사의 큰 족적을 남긴 사람’, ‘변혁을 꿈꾸는 예술탐험가’, ‘플럭서스의 주역’, ‘세계적 퍼포먼서’이자 ‘시대를 이끈 전위 예술가’ 등 즐비한 수식어들을 갖고 있는 백남준 이야기다.

 

◆청년 음악학도에서 세계적 예술가로

 

한국 출신의 세계적 예술가 백남준이 올해 탄생 90주년을 맞았다. 1932년 7월 20일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태어나 2006년 1월 세상을 떠났다. 74년 생애 동안 그가 남긴 예술 업적은 지대하다.

 

서울에서 경기중·고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대학에서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작곡을 공부했다. 청년시절 그의 정체성은 음악도였다. 이희경 음악학자는 백남준 탄생 90주년을 맞아 백남준아트센터에 기고한 글에서 “해방정국 한국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도쿄대 미학과에서 현대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로 졸업논문을 쓴 후 현대음악을 더 공부하러 독일로 건너갔다”며 “1940년대 식민지 조선의 소년이 꿈꾸었던 새로운 음악의 비전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일본으로, 독일로, 미국으로 옮겨갔다”고 설명한다.

 

한반도에 유입된 초창기 신문물이었던 서양 클래식을 접했고, 14살에 당시 음악계의 가장 극단적 전위주의자로 불렸던 작곡가 쇤베르크 접하고 크게 매료됐다. 도쿄대를 마치고 1956년 독일 뮌헨대에서도 음악 공부를 이어갔다. 당시 서독은 유럽 아방가르드 음악의 메카였다. 1958년 미국 실험음악의 대부 존 케이지 등장을 지켜보며 예술행보의 결정적 전환점을 만난다. 기존 주류 현대음악의 진부함과 경직성을 타파하는 실험적 작업에 빠져들었다.

1982년 백남준과 샬럿 무어먼.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1959년 자신만의 ‘행위음악’(action music) 선보여 첫작품인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1959) 등으로 크게 주목받는다. 공연 중에 바이올린을 내리쳐 부수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1960년대에는 ‘음악에서의 네오다다’ , ‘플럭서스:국제신음악페스티벌’ 등을 공동기획하며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 주도적 역할 해나간다. 1961년 시작된 전위적 예술운동 ‘플럭서스’의 창립 멤버로,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독일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했다.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TV’에서 텔레비전 13대와 피아노 3대, 소음기 등을 배치하고, 이 가운데 피아노 1대가 요제프 보이스에 의해 파괴되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이 전시를 시작으로 비디오 아트의 선구적 활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과 함께 음악, 퍼포먼스, 비디오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페라 섹스트로니크’(1967)에서는 무어만이 상의를 드러낸 채 첼로 연주를 한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이희경은 “1960년대 백남준이 도착했을 당시 쾰른은 전 세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집합지로, 온갖 공연과 전시가 넘쳐났고 흥미진진한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며 “당시 백남준은 행위음악이나 퍼포먼스보다는 전자기술과 텔레비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에 꽂혀 미친듯 공부했고 1963년 첫 개인전을 통해 행위음악, 퍼포먼스 예술에서 비디오아트라는 자신만의 새로운 지대를 개척해나갔다”고 설명했다.

 

1973년 ‘글로벌 그루브’, 1974년 ‘TV 정원’ 등 작품으로 예술 창작의 정의와 범위를 확장시킨 것으로 역사에 남았다. 1979년부터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하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1982년에는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가졌다. 1984년 뉴욕과 파리,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 소설 ‘1984’의 저자에게 바치는 백남준 식의 유쾌한 예술 응답으로 미술사의 명장면이 됐다.

1980년 ‘한국과의 만남’과 백남준.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백남준은 생전 전위를 좇는 자신의 성향과 진취성을 두고 “나의 몽골 유전자 때문”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인과 결혼하고 독일에서 공부한 뒤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 미국에서 맹활약한 미국 국적의 예술인 백남준의 이름은 국적, 성별, 나이를 초월한 세계인, 지구인의 상징이 돼갔다. 1993년, 세계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 최고 권위 미술제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독일관 대표 작가로 나서고, 최고 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받는다. 황금사자상 수상자인 그가 모국, 한국관 설립을 위해 뛰었기에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설립이 가능했다. 한국관은 백남준의 선물이었다. 그는 앞서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 등 한국의 국가적 행사와 맞물려서도 초대형 작품 ‘다다익선’을 선사했다.

 

1996년 6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의 왼쪽 신경이 모두 마비됐지만, 신체 장애는 그의 예술혼을 꺼뜨릴 수 없었다. 고국 서울에서도 그는 열정적인 활동을 보여주며 1996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영상전, 1998년 예술의전당에서 판화미술제, 1998년 호암갤러리에서 한국현대미술전 등 전시회를 가졌고, 독일, 스위스, 미국 등에서 대규모 회고전 등 굵직한 전시를 이어갔다. 1998년 뇌졸중 투병으로 휠체어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던 그가 백악관에 초청됐을 때 성스캔들에 휘말렸던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내려뜨린 사건은, 세계적 예술가가 의도한 퍼포먼스였는지, 몸을 가눌 수 없어 벌어진 우연적인 사건이었는지 아직도 추측이 분분하다. 74세를 일기로 미국 마이애미 자택에서 타계한 뒤, 그의 유해는 서울, 뉴욕, 독일에 나눠서 안치됐다.

 

◆연중 행사 풍성

 

올해, 탄생 90주년을 기리는 전시와 예술 행사가 풍성하다. 백남준 연구의 진지 격인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가장 활발하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 생전, 작가와 경기도와 함께 추진돼 사후인 2008년 10월 공식 개관한 곳이다.

‘칭기즈 칸의 복권’(1993).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백남준아트센터는 올해 백남준의 아방가르드 기상을 기리고 백남준의 상상력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한다.

 

먼저 지난 1월 백남준이 남긴 비디오 작품과 백남준 관련 비디오 영상 아카이브를 디지털화해 ‘백남준의 비디오 서재’라는 일종의 스트리밍 플랫폼을 열었다. 지난달부터는 대규모 특별전이 시작돼,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 ‘완벽한 최후의 1초-교향곡 2번’ 두 전시가 한창이다.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는 백남준의 2000년대 대표작인 레이저 작품부터 과거까지 시간의 역순으로,  그의 예술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열가지 순간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2000년 구겐하임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에 출품됐던 ‘삼원소’와 1997년 미국 순회전 ‘전자초고속도로’에 출품된 뒤 한국민속촌이 소장하고 있는 ‘루트 66 BBS’,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칭기즈 칸의 복권’ 등 그의 역작들이 전시됐다.

 

2층에서 함께 열리고 있는 ‘완벽한 최후의 1초 – 백남준 교향곡 제2번’도 의미가 남다르다.

크리에이티브 그룹 OC.m이 백남준이 남긴 악보를 토대로 만든 설치 작품 ‘포르티시모-지하실 (2)’(2022).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백남준의 예술적 시원이 되는 1961년 작품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을 국내 최초로 시연하는 전시다. 그가 음악에 악보가 있듯 그는 자신의 융합적 예술 세계에 걸맞는 일종의 ‘악보’를 만들어 두었는데, 그 악보에 쓰인 대로 현대미술가들이 전시장에 작품을 구현한 것이다. 요리의 레시피,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백남준이 남겨둔 기록을 토대로 현대미술가들이 자신이 이해하는 선에서 상상을 더해 시각화한 것이다. 백남준은 이 전시 악보들을 창안하고 그 20장의 악보를 일컬어 교향곡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독일의 한 축제에서 약식으로 구현된 적이 있을 뿐 이처럼 본격적으로 전시장에 구현된 것은 처음이라는 설명이다. 이희경은 “음악이 전시되고 공간이 음악이 되는, 음악의 새로운 존재론을 펼친 백남준의 선구자적 시도가 61년만에 처음으로 실현된다”고 평했다.

일반 공개 당시 ‘다다익선’(1988)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나의 축제는 거칠 것이 없어라’라는 축제도 열린다. 제목은 백남준이 생전 발간한 LP 앨범 제목에서 따왔다. 탄생일인 7월 20일부터 한달간 백남준아트센터 안팎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연극, 실험음악, 퍼포먼스, 관객 참여 이벤트 등이 펼쳐진다.

 

7월에는 백남준의 동료이자 실험영화 감독이었던 요나스 메카스 탄생 100주년 및 백남준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가 리투아니아 문화원과의 공동주최로 열려 심층적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

 

이밖에 11월 서울시립미술관이 백남준 전시를 열고, 국립현대미술관도 하반기에 소장품 ‘다다익선’을 과천관에서 재가동하고 백남준 축제를 열 계획이다. 대전시립미술관도 올해 탄생 90주년을 맞아 소장품인 백남준의 ‘프랙탈거북선’ 전용 전시실을 갖추고 원형을 복원해 공개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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