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한 작품들, 세계 미술계 사로잡아
“생물·문명계 통섭, 살아가는 의미 탐구”
설치·영상 등 통해 소리의 가능성 탐구
난민·이민자가 겪는 참혹한 현실 전해
작품 ‘공명기’ 실제로 연주 퍼포먼스도
◆한국계 아니카 이 국내 첫 개인전
매운 듯하면서도 시원한 향이다. 알싸한 계열인데 후각을 찌르기보다는 깊고 은은하게 대기 속에 깔린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특이하고 재미있는 냄새다.
이 향수는 아니카 이(Anicka Yi·51)가 일본적군(赤軍) 리더 시게노부 후사코를 모델로 만든 향이다. 시게노부는 혁명을 꿈꿨고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테러리스트였으며 지금은 만기 출소한 할머니다.(작품 제작 당시에는 수감 중이었다.) 이외에도 기원전 1500년 이집트 최초 여왕으로 전해지는 하셉수트를 모델로 한 향, 미래의 여성들을 위해 만든 향도 있다. 역사 속 인물들 초상을 냄새로 표현한 작품으로, ‘초상향’인 셈이다. 이 향들은 버섯에서 영감 받아 3D페인팅 기계로 만든 작은 조형물 안에 각각 담겨 전시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 글래드스톤 갤러리에서 아니카 이의 아시아 첫 개인전 ‘비긴 웨어 유 아(Begin Where You Are)’가 시작됐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지금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미술가 중 한 명이다. 이끼와 박테리아 같은 조류(藻類)와 곰팡이 따위로 작품을 하고 온갖 특이한 냄새를 동원하는 독특하고 기발한 작품들로 세계를 사로잡았다.
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가 풀색 카펫을 밟고 숨을 들이키는 순간, 관람은 시작된다. 전시장엔 진한 야생의 생태계 속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난다. 향을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 목록에서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냄새에도 예민한 작가의 전시인 만큼 향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본격적으로 작품에 눈을 돌리면, 생화로 착각하게 할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들을 둘러싼 기묘한 액자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우툴두툴한 표면, 숭숭 난 구멍 위로 난 털들은 작품명대로 ‘치킨 스킨(chicken skin)’, 우리말로 닭살이다. 소름이 돋아 털이 곤두선 피부를 표현한 것인데, 아름다우면서도 흥미로운 매력의 작품은 실은 동물의 긴장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지하로 내려가면 금속 뼈대 위로 벌집 형태가 늘어져 걸쳐있고, 표면엔 유충이 연상되는 구슬이 올라가 있는 작품 ‘네스트(Nest)’를 만난다. ‘네스트’ 하단에는 보일 듯 말 듯, 숨기듯 달아놓은 전자시계 숫자가 째깍째깍 넘어간다. 마치 다가오는 위기를 시각화한 카운트다운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커다란 패널에 말미잘과 아메바 같은 형태가 일렁이듯 맨질하게 깎인 ‘아네모네 패널(Anemone Panels)’, 바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템푸라 프라이드(Tempura-Fried Flower)’등 오감을 동원케 하는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갤러리 측은 작가의 지난 10여년 작업을 관람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마음으로 기획했다고 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서울에 도착하기 전부터 한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작품을 소개할지 고민했다. 아마도 제 작업이 익숙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제 작업의 기초적인 어휘들을 보여주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계적인 것과 생태계적인 것이 결합된 하이브리드형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과거 해외 인터뷰에서 그는 미술만을 위한 미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미술을 하고싶다고 밝힌 바 있다. 전시장에서 그는 “바이오매스(biomass·생물계)와 테크노스피어(technosphere·문명계) 두 영역이 서로 소통되고 통섭될 수 있게 하는 것, 한쪽이 다른 한쪽을 무시하지 않게 하는 것. 이런 콘셉트를 통해 오늘날 세계에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계인 작가에겐 서울 첫 개인전 의미가 남다르다. 서울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온 가족이 이민을 갔고 그 후로 서울에 온 건 세 번 정도에 불과해 모국과 접점이 적었다. 하지만 한국 이름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 현, 경”이라고 또박또박 소개하는 얼굴에 설렘이 묻어났다. 한국에서의 전시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면 굉장히 감성적이 될 것 같다. 내게 의미하는 바가 크고 이 경험 자체가 너무 특별해서, 그런 감정들이 모두 들어가 있는 전시”라고 말했다. 7월8일까지.
◆설치미술가 네빈 알라닥 한국 첫 개인전
물과 뭍의 경계에서 이리도 저리도 가지 못하고 둥둥 뜬 물체. 파도에 떠밀려 땅에 닿았지만 땅에서 자꾸 배척돼 정착하지 못하는 신세다. 7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인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비극적 장면이 떠오른다. 2015년 터키 해변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 2013년 이 작품을 내놓았던 작가는 세계 곳곳 난민 모습에서 다가올 비극을 먼저 포착했던 걸까. 독일 베를린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터키 출신 세계적 설치미술가 네빈 알라닥(50)의 3채널 영상 작품 ‘세션(Session)’ 한 장면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알라닥의 한국 첫 개인전 ‘모션 라인’이 한창이다. 갤러리 2층에서는 알라닥 작업 세계를 대표하는 3채널 영상 작품 ‘흔적(trace)’과 ‘세션’이 교대로 상영되고 있다. 밀물을 따라 모래사장에 닿았지만 계속 파도를 맞으며 더이상 전진하지도 후퇴하지도 못하는 물체, 줄에 매달려 모래 바닥 위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거칠게 끌려가는 물체의 왠지 모를 처연한 풍경이 연신 나온다. 이 물체들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악기들. 결국 작품은 떠도는 민족이나 공동체, 사람들을 의인화한 악기를 주인공 삼고, 이들이 겪는 고난의 여정을 보여준다.
갤러리 측은 “파도를 가르며 질주하는 종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는 난민의 삶을, 길가에 우두커니 놓인 북의 쓸쓸한 모습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주자의 정체성과 취약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알라닥은 유난히 청각을 자극하는 미술가다. 설치와 조각, 영상, 퍼포먼스 등으로 소리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전쟁과 난민 등의 문제를 꺼내 왔다. 갤러리 1층 ‘공명기’ 연작이 대표적이다. 기하학적 형태들에 현악기 줄을 덧대거나, 작은 종을 수십개 달아놓은 등, 조각과 악기 사이 쯤인 물체를 발명하고 ‘공명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공명기는 하프, 만돌린, 어쿠스틱기타를, 어떤 공명기는 베이스기타와 첼로 등 여러 악기들을 결합한 복합체다. 시공을 초월해 소리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여러 문화권 오브제를 혼성했다. 혼성을 수용하는 것이 마땅한 이 시대 미감을 제시하려는 작가의 치열한 노력 또는 배려로도 읽힌다.
알라닥이 소리에 천착하게 된 이유가 뭘까. 갤러리 측은 “소리는 영토나 신체의 범주를 초월해 가장 유동적이며, 언어나 지식 체계의 한계를 넘어 자유로운 형태의 사유가 가능하고 다양한 감각기관으로 확장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명기’를 실제로 연주하는 퍼포먼스가 6월4일과 7월2일 갤러리에서 벌어진다. 전시는 7월2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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