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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수묵화에 가려진 色을 찾다

입력 : 2022-06-13 19:26:21 수정 : 2022-06-13 19:2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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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진주 ‘한국채색화의 흐름…’展 막바지 관객몰이

진주박물관·이성자미술관 함께 전시
수묵화로 대표되는 한국화 범위 넓혀
채색화 의미 재조명… 6만여명 다녀가

공민왕·김홍도부터 김은호·박노수…
산수화·인물화·민화 다채롭게 선봬
작가 미상 ‘일월부상도’

14세기 고려시대, 종이에 채색한 작품인 공민왕 ‘천산대렵도’를 수백년 지난 지금 일부나마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하다. 바래고 닳아 해진 자국은 유구한 세월을 드러내고, 그 사이로는 말 네 마리와 기마인물을 표현한 기운찬 필치와 섬세한 채색이 살아 숨쉰다. 조각난 그림이라 전체 모습을 알기는 어렵지만, 고려시대 뛰어난 회화 수준을 넉넉히 실감할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천산대렵도 맞은편에 놓인 1930년 모사된 고구려 6세기 말∼7세기 초 ‘강서대묘 청룡 모사도’는 힘찬 필선과 생동감 있는 색 활용으로 고구려 회화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어 고려 불화, 조선시대 초상화, 근현대 채색화들로 이어지는 작품 속에서 우리 민족이 지닌 ‘색채 DNA’가 장구한 역사 속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한국 채색화 흐름

국립진주박물관과 진주시,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공동 주최로 지난 3월 말부터 이어진 ‘한국 채색화의 흐름, 참(眞) 색과 참 빛이 흐르는 고을(晉州)’ 전시가 미술계에 묵직한 화두를 던지며 막바지 관객몰이 중이다.

경남 진주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에 다녀간 관람객은 6만명을 넘겼고, ‘한국화=수묵화’의 고정관념을 깨며 한국화의 정체성을 확장하려는 기획이 이목을 끌었다.

김은호 ‘의기 논개상’

전시는 고구려 고분 벽화를 시작으로 한국의 화려하고 장엄한 채색화의 원류를 살피며 그 맥을 이어온 고려시대 공민왕의 천산대렵도를 비롯해 조선시대 김홍도와 신윤복의 채색화와 수갑계첩, 호혼례도, 경기감영도, 십장생도, 책가문방도, 일월오봉도 등 역사적 작품들을 보여준다. 이어 민간으로 확장·변용돼 그려진 일월오봉인 일월부상도와 채용신의 팔도미인도, 이당 김은호가 그린 조선시대 대표 여성 춘향, 논개, 아랑을 전시장에 모았다. 근대 시기 장우성, 김기창, 성재휴, 박생광, 천경자, 박노수, 박래현 등에 이어 현대의 이숙자, 원문자, 황창배 등 한국 채색화 명맥을 이어온 작가들의 수준급 대표작을 선보인다.

조선시대 ‘일월부상도’는 궁궐에서 왕 뒤에 놓였던 해와 달, 다섯 봉우리 그림을 민간에서 변형해 민화화한 것이다. 황실 미술이 민간으로 확장되는 근대화의 상징적 표상으로 의미를 부여해 전시에서 주요하게 배치됐다. 리움 소장품으로 수장고에서 전시장으로 나온 적이 드문 작품으로 꼽힌다.

천경자 ‘굴비를 든 노인’

OCI미술관 소장품인 채용신의 ‘팔도미인도’, 금성출판문화재단 소장품인 천경자의 ‘굴비를 든 노인’도 역시 유명세에 비해 실제로 관람할 기회가 극히 드물었던 그림이다. 이숙자의 ‘청맥’은 2010∼2012년도 제작 작품을 재제작한 작품이어서 눈길을 끈다. 기존 보리밭 지평선 위 하늘 부분을 모두 보리밭으로 덧그려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킨 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관람객에게 선보였다.

진주 남강변 진주성 안에 위치한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삼국∼고려시대 채색화를 시작으로 중세부터 근대까지의 채색화 흐름을 정리하고, 영천강을 건너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으로 향하면 근·현대 채색화로 전시가 이어진다. 전통예술 고장 진주의 두 전시 장소를 관람객이 두 발로 오가며 우리 미술사의 한 축으로서 채색화의 역사를 여행하듯 훑게 된다.

◆확장하는 한국 채색화

이번 전시는 수묵화로 좁게 대변된 한국화 범위를 확장하며, 채색화 원류를 찾아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는 노력으로 의미 깊게 평가된다.

이숙자 ‘군우-얼룩소 3, 4’

전시는 특히 ‘민화’를 우리 전통 채색화 범주로 품어냈다. 전시 실행위원회 측은 “서민과 민중의 그림이었다는 의미의 ‘민화’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861)가 명명한 것이다. 조선 채색화의 한 갈래인 민화를 민중이나 서민의 것으로 한정하는 것은 마치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이 동양과 아메리카, 아프리카 국가들의 문화를 민속예술(Folk Art)이라는 관점에서 읽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관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민화’는 상류층과 중인들의 생활장식화로 사용됐다는 점에서 채색화라는 보다 넓은 맥락과 근대 문화의 발로라는 점에서 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채색화의 전통을 지켜온 궁중회화가 상업 발달, 중인 계급 부상이라는 사회 변화가 진행되면서 한국적 근대국가로의 이행기에 민간에 확산된 것이란 얘기다. 19세기 말 궁중에서 그림 관련 일을 도맡았던 도화서가 폐지되면서 도화서 화원들이 그림을 그려 팔았고 궁중 양식 그림이 민간에서 거래되는 일이 일어났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고도의 장식성을 가진 궁중회화가 소박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민화와 만나 채색화의 한 유파로 나타났다고 강조했다.

전시 실행위원인 이원복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은 “채색과 장식은 지나치면 번잡하여 생명력이 감소된다. 우리 민족은 화려보다는 화사, 소박하나 누추하지 않은 ‘해맑고 밝음’(명징·明澄)으로 대변된다”며 “전통 채색화에 대한 연구 성과와 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우리 채색화의 흐름을 산수화와 인물화 중심으로 전시에 펼쳐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를 기획한 이번 특별전 실행위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공립 기관과 미술계 현장에서 수십년 역사를 써온 미술계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의기투합해 결성한 것이다. 이원복 전 실장과 정준모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을 비롯해 최열, 윤철규, 조은정, 김진령, 박성식, 구대회, 김우연, 허금숙 등 학자와 기획자들이 참여했다.

실행위 측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실행위가 주최 측인 진주시나 전시 추진위원회로부터 주제와 작가 선정에서 전권을 위임받아 가능한 전시였다”고 밝혔다. 이어 “대개 지역 미술 전시의 경우, 지역 작가 안배 등 지역사회 요구로 인해 전시기획을 하는 전문가 그룹과 충돌이 있기 마련인데, 이번 전시는 전문가에 전시기획을 완전히 일임해 지역 미술 행사에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점도 이번 전시의 큰 수확”이라고 밝혔다. 6월19일까지.


진주=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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