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채무 비율 가파른 상승세
재정준칙 법제화 번번이 무산
나랏빚 관리할 기준 마련 시급
정부가 최근 총지출을 올해보다 8.1% 늘린 728조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했다. 내수 침체와 미국발 관세 충격을 극복하면서 ‘기술 주도 초혁신 경제’ 전환도 이뤄야 한다며 대규모 재정 투입을 예고했다. 우리가 강점을 가진 제조업에 인공지능(AI)을 결합하는 ‘피지컬 AI’ 선도 국가 달성을 위해 AI 로봇·자동차·조선·가전 및 반도체·팩토리 5대 분야를 중심으로 집중 투자하겠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경제가 어려우면 민간 투자는 위축되기 마련이다. 이럴 때 정부가 재정을 풀어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인다. 미래를 위해 과감한 투자에 나서는 것도 옳은 방향이다. 세금 수입이 부족해도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위해 투자할 목적으로 어느 정도 빚(국가채무)을 늘리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확장재정으로 전환하면서 앞으로 국가채무를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가 돈을 더 쓰기로 한 상황에서 경제가 급반전해 세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지 않는 이상 나랏빚은 더 늘어난다. 하지만 무한정 늘릴 수는 없다. 과도한 국가채무는 국가 신용등급을 떨어뜨리고, 조달금리가 올라 민간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세금 인상 압력이 커지고 미래 세대에 부담을 전가할 가능성이 있다. 빚 상환에 들어가는 돈이 많아지면 복지 지출이 축소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국가가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재정수지, 국가채무, 지출, 세입 등에 일정한 기준을 설정해 법적으로 관리하는 ‘재정준칙’을 도입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여러 차례 논의는 있었다. 여러 의원이 관련 법안을 수차례 발의했지만 번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2022년 9월에는 정부가 재정준칙 도입방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당시 정부안을 보면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3% 이내로 유지하고, 국가채무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60%를 초과하면 2%로 축소한다는 기준이 제시됐다. 재정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5년마다 한도를 재검토하고 전쟁, 대규모 재해, 경기침체 등 예외 상황에서는 이 준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보완장치도 뒀다. 국가재정법을 개정해 법제화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예산안이 확장적으로 전환되면서 실질적인 나라살림 수준을 보여주는 관리재정수지의 GDP 대비 적자 비중은 내년 4.0%에 달할 전망이다. 이후에도 2027년 4.1%, 2028년 4.4%, 2029년 4.1%를 기록할 것으로 정부는 내다보고 있다. 이번 정부 임기 말까지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4%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인데, “사실상 재정 건전성 관리를 하지 않겠다는 무책임한 접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을 보면 한국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1997년만 해도 11.1%에 불과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불어나기 시작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 등을 위해 재정이 대거 투입되면서 2020년(41.1%) 40%대로 올라섰다. 지난해에는 48.3%였고, 내년에는 50%대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가채무 비율이 100%를 넘는 미국이나 200%를 웃도는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다만 나라마다 경제 규모가 다르고 신용도 역시 같지 않아 그 적정선을 숫자로 딱 잘라 얘기하기는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의 진짜 문제는 수치 자체보다 지나치게 빠른 상승 속도라는 게 나라 안팎의 공통된 우려다.
정부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방송에 출연해 “국가채무가 괜찮다는 얘기는 안 하겠다. 국민이 우려하는 상황도 잘 알고 있다”며 “내년도 예산안을 짜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재정수지 적자, 국가채무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어느 수준까지 관리하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알고만 있으면 될 일인가. 경제정책 수장이라면, 안팎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게 되도록 빨리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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