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정신질환 분야 차별적 경쟁력
국가서 데이터 인프라 구축 필요
결단 안하면 10년 뒤 성과도 없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공지능 패권 경쟁의 성패는 GPU, 즉 연산 자원을 얼마나 많이 확보했는지로 갈렸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수십만 장의 GPU를 확보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쏟아부었고, 그 규모 자체가 곧 기술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단순히 연산 능력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압도적 차별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일론 머스크가 지적했듯이, 인류가 축적해 온 공개 지식은 이미 대부분 학습에 쓰였고, 인터넷상의 텍스트나 이미지에서는 새로운 자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결국 승부처는 ‘누가 더 희소하고 질 높은 데이터를 갖는가’로 옮겨가고 있다. 인공지능 산업의 무게중심이 하드웨어에서 데이터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 속에서 한국은 역설적인 기회를 맞는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GPU를 수십만 장 동원하는 초대형 투자를 따라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국은 전 국민 단일 건강보험 체계와 표준화된 의료 데이터 환경이라는 드문 강점을 보유하고 있다. 병원마다 쌓여 있는 방대한 진료 기록과 의료 영상은 규모와 품질에서 국제적으로도 손꼽힌다. 정부는 이미 100만명 규모의 유전체·임상 정보를 모으는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 사업을 시작했다. 이는 한국이 다른 나라가 쉽게 넘볼 수 없는 독점적 데이터 자산을 쌓을 수 있는 토대를 이미 확보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질환을 망라한 방대한 데이터 구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 한국이 집중해야 할 분야는 정신질환이다.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은 단순 유전체 정보만으로는 진단이나 예측이 어렵다. 수많은 유전적 변이와 환경 요인, 발달 경로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한 열쇠는 뇌영상과 뇌파, 인지기능 검사와 같은 다층적 데이터다. 유전체, 뇌영상, 인지기능과 임상 증상을 결합해야만 질환의 총체적 이해와 조기 예측이 가능하다. 한국이 이 분야에 자원을 집중한다면 세계가 주목할 차별적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해외는 이미 이런 방향으로 앞서가고 있다. 미국의 ENIGMA 컨소시엄은 전 세계 수만 명의 뇌 MRI와 유전체 데이터를 결합해 정신질환 연구를 선도하고 있다. 휴먼 커넥톰 프로젝트는 10년에 걸쳐 뇌 연결망을 정밀하게 지도화했고, 영국의 UK 바이오뱅크는 50만명 규모의 유전체·의료 데이터를 통해 희귀 질환까지 연구할 수 있게 했다. 알츠하이머병 신경영상 이니셔티브(ADNI)는 장기간의 추적 영상 데이터를 활용해 치매 조기진단 연구에 혁신을 가져왔다. 이런 데이터 인프라는 한번 구축되면 수많은 연구를 가능하게 하고, 전 세계 연구자가 달려드는 공공재로 기능한다.
한국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정부, 병원, 연구기관이 협력해 정신질환 뇌영상 빅데이터 국가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한다. 향후 10년간 2만명 규모의 정신건강 코호트를 모집해 종단적으로 추적한다면, 한국 고유의 유전적·사회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세계 유일의 데이터 자산이 될 것이다. 이렇게 구축된 데이터는 철저한 비식별화 과정을 거쳐 연구자들에게 개방하고, 국내외 협력을 통해 AI 모델 개발과 산업화로 이어져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과학적 성과를 넘어 데이터 활용의 윤리성·투명성·사회적 합의를 확보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민이 신뢰하는 데이터 거버넌스를 마련해야 지속 가능한 연구 생태계가 가능하다.
AI 경쟁은 더 이상 GPU가 아니라 데이터의 질에서 판가름 난다. GPU에서 뒤처진 한국이 데이터에서 앞서간다면 단순 추격자가 아니라 선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특히 정신질환 뇌영상 빅데이터 구축은 국민 건강을 위한 투자이자 미래 AI 산업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한국판 UK 바이오뱅크, 한국판 ADNI, 한국판 ENIGMA의 탄생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결단하지 않는다면 10년 뒤 얻을 성과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데이터 중심 AI 전략으로 과감한 전환을 이뤄야 한다.
권준수 한양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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