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와 달리 낙수효과는 없는데 기초연금·무상보육 등으로 돈 쓸 곳은 늘어난 박근혜정부로서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대선공약인 “증세는 없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한쪽으로는 담뱃세, 주민세 등을 올리니 ‘꼼수 증세’라는 비아냥만 사고 있다. 담뱃값 인상과 연말정산 파동을 거치면서 정부는 증세냐, 복지 축소냐의 갈림길에 선 모양새다. 차제에 증세 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법인세’에 대해선 손을 댈 수 없다는 입장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은 지난 22일 기자들과 만나 “세계적으로 법인세를 낮추고 있는 상황에서 나홀로 법인세를 인상할 경우 부작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근본적 문제의 시발은 증세를 안 한다는 데 있다”면서 “박근혜정부는 증세를 결단하지 않고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어떠한 치적도 쌓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증세 없이 양극화를 완화하고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구조개혁에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다. 더욱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정부 복지정책과 소득재분배 기능이 바닥에서 맴도는 수준이다.
25일 기획재정부와 국회예산정책처 등에 따르면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의 세전·세후 변화를 보면 우리나라는 변동폭이 0.03으로 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이다. OECD 평균 변동폭은 0.16이다. 김재진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조세연구본부장에 따르면 조세를 통한 불평등 개선 효과는 한국이 8.7%로 OECD 평균 31.3%보다 한참 떨어진다. 지니계수는 0에 가까울수록 빈부격차가 작다는 것을,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세전 지니계수는 2010년 기준 0.34로 OECD 회원국 중 비교 가능한 31개국 가운데 가장 낮다. 하지만 정부 정책의 소득재분배 기능이 작용한 세후 지니계수는 0.31로 0.03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정부정책이 반영된 지니계수는 회원국 중 16위로 뚝 떨어진다. 아일랜드의 경우 지니계수가 세전 0.59에서 세후 0.33으로 0.26이나 떨어졌고 핀란드와 벨기에는 세후 지니계수가 0.26으로 세전보다 0.22 낮아졌다.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독일은 각각 세후 지니계수가 0.25, 0.27, 0.29로 세전보다 0.21 줄었다. 우리보다 세전, 세후 지니계수 변동폭이 작은 국가는 칠레로 0.53에서 0.51로 0.02 낮아지는 데 그쳤다.
정부 정책에 따른 빈곤율 감소 효과 역시 OECD 회원국 가운데 한국이 가장 작다. 2013년 한국의 빈곤율은 시장소득 기준 18.9%, 처분가능소득 기준 16.4%로 정부 정책 효과에 따른 빈곤율 감소 효과는 2.5%포인트 정도다. 빈곤율이란 중위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계층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이에 비해 2011년 기준으로 아일랜드는 정부 정책 전 시장소득 기준 빈곤율이 41.4%이지만 정책 적용 이후 처분가능소득 기준 빈곤율은 9.7%로 정부 정책의 빈곤율 감소 효과가 무려 31.7%포인트나 됐다. 프랑스는 정책의 빈곤율 감소 효과가 27.0%포인트였고 이어 핀란드 24.4%포인트, 독일 24.2%포인트, 체코 23.2%포인트, 벨기에 23.0%포인트 등으로 한국과는 비교가 무색할 정도로 효과가 컸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양극화를 완화하는 데는 조세를 통한 소득재분배 기능이 굉장히 중요한데 우리는 꼴찌 수준”이라며 “구조개혁에 성공하려면 소득재분배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득세 부담, 법인↓ 개인↑
박근혜정부는 증세 없이 복지재원을 마련한다는 방침이었다. 세율을 올리는 대신 세금 비과세·감면 축소, 지하경제 양성화, 정부지출 구조조정 등으로 5년간 135조원을 조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증세 없이 복지재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담뱃세, 주민세 인상, 연말정산 방식 개편 등으로 이미 증세는 시작됐다. 세목을 늘리거나 세율을 올린 게 아니라서 증세가 아니라는 정부와 여당 일각의 주장은 실제로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국민 개개인에게는 복장 터지게 하는 형식논리일 뿐이다.
조세저항 민심을 더욱 부추기는 것은 조세 형평성 문제다. 법인보다 개인의 세 부담을 키우는 흐름이 민심을 한층 더 자극하고 있다. 실효세율 기준으로 2008년 20.5%이던 법인세율은 2013년 16.0%로 4.5%포인트 낮아진 반면 근로소득자의 소득세는 같은 기간 4.0%에서 4.5%로 0.5%포인트 올랐다. 2008년 13.9%이던 개인 종합소득세율은 2009년 13.1%로 소폭 하락했다가 2013년 다시 13.9%로 올라갔다. 결국 ‘증세 없는 복지’는 법인들의 세 부담은 줄이고 개인들의 세 부담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정대영 송현경제연구소장은 “당장 증세를 해야 한다기보다는 누락되는 세금을 제대로 걷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정 소장은 “조세 형평성을 높이는 건 경제정의를 세우는 일이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
류순열 선임기자, 이귀전 기자 ryoo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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