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가 태어난 1989년 한국 경제는 엔저(엔화 약세)로 휘청했다. 엔고(엔화 강세)의 단맛에 취한 88년만 해도 전년 대비 28.4% 늘어난 수출 덕분에 11.7%의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경상수지 흑자가 넘쳐 주가와 집값이 마구 뛰는 바람에 수입 개방화 조치가 단행되기에 이르렀다. 거짓말같이 89년 들어 엔화는 약세로, 원화는 강세로 돌아섰고 일본 기업에 세계시장을 내준 수출전선에는 비상이 걸렸다. 수출 증가율이 2.8%까지 추락해 간신히 ‘마이너스’를 벗어났고,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년 대비 반토막 수준인 6.9%로 내려앉았다. 엔저의 ‘그늘’로 90, 91년 경상수지는 적자를 이어갔다.
25년이 흐른 2014년 한국 경제는 엔저와 ‘리턴매치’를 벌이게 됐다. 89년과 달리 몰라보게 탄탄해진 펀더멘털(기초여건)을 갖춘 만큼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라는 게 산업계 전언이다. 그동안 수출 규모는 89년 623억8000만달러에서 지난해 5596억5000만달러로 9배 가까이 늘어 4년 연속 세계 수출 7강, 3년 연속 무역 1조달러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GDP도 89년 158조6000억원에서 2012년 1272조5000억원으로 8배 넘게 불어나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했다. 세계시장을 주름잡는 대기업은 엔저 대비책으로 이미 해외생산 확대를 꾀했다.
거듭된 ‘엔저 공습’에 대처하는 한편 앞으로도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현 산업구조를 고부가가치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재편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예를 들어 조선업은 상선에 비해 부가가치가 높은 해양 플랜트로 산업의 무게중심이 옮겨졌지만, 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설계를 비롯한 지식기반의 엔지니어링 서비스는 여전히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양 플랜트 수주액의 절반 이상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이 현실이다.
장석인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5∼6년은 중국을 필두로 한 신흥국의 급성장세에 힘입어 기존 산업구조로도 수출에 문제가 없었다”며 “이런 과정에서 특정 업종과 대기업에 부가 쏠리는 폐단을 낳은 만큼 산업구조를 재편할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를 무대로 시장을 넓히고, 효율성을 높이는 노력만으로도 기업 운영에 지장이 없다 보니 신성장동력 개발을 위한 대규모 연구·개발(R&D)이나 투자는 주춤했고, 신수종 중심의 산업구조 재편도 지지부진했다는 설명이다.
기업들이 효율을 높이려고 자동화에 매달린 나머지 투자에 따른 일자리 창출 효과도 반감됐다. ‘탈(脫)한국’ 현상을 보이는 기업의 해외진출 급증세도 산업구조 재편에 걸림돌이 됐다. 국내 규제를 피해 저임금을 찾아나선 한국 기업의 해외투자 규모는 89년 5억7000만달러에서 2012년 231억6000만달러로 40배 넘게 증가했다. 같은 기간 GDP는 연평균 30.5%씩 늘었지만, 해외투자 증가율은 연 172.3%에 달했다. 이에 반비례해 국내 설비투자는 둔화됐고, 생산기반 약화와 일자리 창출 저하로 이어졌다. 장 연구위원은 “산업구조가 고부가가치 중심으로 재편되려면 무엇보다 기업들의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며 “정부가 앞장서 투자여건을 개선하고, 신성장동력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해 기업이 믿고 따라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계식 기자 cul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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