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일반인의 3배
범죄피해 초기단계부터 적극 치료를 “너 혹시 엄마한테 뭐 숨기는 거 있니?” “사실대로 얘기하면 혼 안 낼 거야?”
주부 곽모씨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6살짜리 외동아들은 울먹이며 이웃집 아줌마의 ‘만행’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 나갈 때마다 아들을 돌봐주던 옆집 이혼녀였다. 변태성욕자인 그는 아이에게 온갖 성학대를 일삼았고, 하혈을 이상하게 여긴 엄마의 추궁 끝에 아이가 입을 연 것이다. 곽씨는 “내 새끼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며 “5년이 지났는데도 아이는 아직 힘들어 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끝없는 두려움 = 범죄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세상이 무서워 문 밖을 나설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범행이 재발할 것이라는 공포와 타인에 대한 이유 없는 불신이 이들을 줄기차게 옥죈다.
이모(여·42)씨는 남편과 이혼한 후 지난해 초 이웃의 소개로 만난 한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4개월간 교제했다. 그러나 아들이 반대해 남자에게 결별을 요구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남자는 출근길 이씨에게 칼을 휘둘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 이씨는 가해자와 비슷한 체형의 남자만 보면 몸을 숨기기 일쑤고 대인기피증이 극도로 심화돼 1년 넘게 바깥 출입을 못하고 있다.
박모(여·24)씨는 지난 5월 새벽 귀가길에 큰 변을 당할 뻔했다. 술 취한 40대 남성이 그를 덮친 것. 다행히 박씨의 비명을 듣고 주변을 지나던 학생들이 달려와 가까스로 위기를 면했다. 그러나 후유증은 간단치가 않았다. 경찰청 케어팀 관계자는 “박씨는 스트레스를 술로만 달래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범죄 피해는 때때로 가족 해체를 유발하기도 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에게 형을 잃은 안모(당시 43세)씨 자살이 대표적인 사례다. 안미란 천주교 사회교정사목위 사무국장은 “남은 가족 모두 상처를 안고 사는 탓에 서로를 돌볼 겨를이 없어지고, 그러다 보면 남처럼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끔찍했던 기억을 되살리게 하는 ‘상징’을 지우는 데 열심이다. 범죄피해자 대부분이 이사를 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동성폭행 피해자의 보호자인 정모씨는 “주변의 입방아도 신경 쓰였지만 무엇보다 아이가 너무 힘들어했다”며 “상담센터에서도 환경을 바꿔주는 게 치료에 효과적이라고 말해 뒤도 안 보고 이사했다”고 말했다.
◆조기치료가 중요 = 범죄피해자들은 악몽을 통한 범죄상황의 재경험, 수면장애, 대인기피 등을 공통적으로 경험한다. 전형적인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증상들이다.
법무부가 2007년 한림대 의과대학에 의뢰해 내놓은 연구용역 보고서 ‘PTSD의 현황과 대책’에 따르면 범죄피해자의 PTSD 평생 유병률(평생에 한번 이상 질환이 발생한 비율)은 25%로 일반 인구의 9.4%보다 3배 가까이 높았다. 범죄별 PTSD 진단비율을 살펴보면 강간 피해자가 49%로 월등히 높았고 폭행 피해자(39%), 성추행 피해자(24%)가 뒤를 이었다.
전문가들은 PTSD를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의 상처’로 남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는 것은 물론 우울증 등 동반 질환을 가져와 심각한 정신과적 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병철 한림대 정신과 교수는 “시간이 약이려니 하면서 손을 놓고 있다가는 심각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며 “범죄피해 이후 초기 단계에서 적극적인 치료를 받는다면 정신적으로 더욱 건강해지는 ‘외상후 성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특별기획취재팀=염호상(팀장)·박성준·조민중·양원보·송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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