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연기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이정재 보러 극장 간다” “하녀 이후 그의 연기가 만개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미리 접어두는 게 좋다. 2시간 20분 분량의 영화에서 수양대군이 첫 등장하는 건 1시간을 훌쩍 넘겼을 때다.
‘그’의 등장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팬들은 처음엔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첫 등장이 어마무지하다. 막 사냥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들짐승의 사체와 함께 걸어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위용’이 느껴지게 한다. 검은색 털 조끼며, 얼굴에 난 흉터들은 수양대군의 캐릭터를 단시간에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의 수양 캐릭터란 사료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작가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어떻게든 계유정난(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조선 최고의 관상가 김내경(송강호 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려다 보니, 자연스레 수양은 악역 혹은 반동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정재는 최근 세계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실존인물을 연기하는 데 있어 고민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수양대군을 연기한 제 얼굴이 왕의 상이냐, 역모의 상이냐 하는 것은 보는 이들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수양이 주인공인 영화에서라면 김종서가 악역으로 묘사될 텐데, 이 영화는 그 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죠. 극 중 역모상이란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관상가 스토리니까 수양의 그쪽만 부각하고 차용해서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수양대군을 연기하면서 실제와 허구 사이에서 혼란스러웠어요. 여러 자료를 보면서 제가 느낀 수양의 면모는 ‘상남자’라는 거였죠. 그래서 의도적으로 몇 가지 설정을 해놨어요. ‘이 사람은 왕이 될 인물이다’ ‘왕이나 귀족으로서 품위가 있어야 한다’ ‘목적을 위해서는 살생도 가리지 않는다’ ‘내면에 잠재된 폭력성이 많다’ 등등. 대사나 등장하는 신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신경 쓸 게 참 많았어요.”

“아마 연출자(한재림 감독)의 고심이 컸을 거예요. 영화 1시간 후에야 등장하니, 평범해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털 소재 의상을 입어 주변 인물들보다 도드라지게 보였으면 하시더라고요. 위협적인 인상을 위해 얼굴에 흉터도 두 개 그려 넣었고요. 소위 ‘깡패’ 같으면서도 왕족의 기품은 있어야 했거든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흥미롭고 재미있었어요.”
그가 이번 영화에 참여하게 된 건 하녀(감독 임상수·2010)의 영향이 컸다. 한재림 감독은 하녀에서 이중적인 부잣집 남자 캐릭터를 연기한 이정재의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수양대군을 떠올렸다고 한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욕, 주변 사람들을 끝까지 챙기는 의리, 그리고 결단을 내리고 그 결단을 실행하는 단호함과 잔인성 등 다양한 모습이 공존해 있었다.
“언제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에 재미를 느껴요. 역할이 한쪽에만 치우쳐지면 매력이 덜하지 않나요. 그래서 현장에서 자꾸 아이디어를 내게 돼요. 같은 대사라도 첫 번째, 두 번째 느낌이 다 다르게, 혹은 입체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거죠. 사람들이 휴대폰 사면 이런 기능, 저런 기능을 자꾸 추가하고 찾게 되는 거랑 비슷하다고나 할까요?(웃음)”
관상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그의 ‘목소리(발성)’다. 수양대군으로서 짧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데에는 이 목소리가 한 몫 했다. 물론, 미리 연습하고 신경 쓴 덕분이다.
“외모는 강력한데 목소리가 받쳐주지 않으면 균형이 안 맞잖아요. 촬영장 가기 2시간 전부터 발성연습을 쉬지 않았어요. 웃을 때는 듣는 사람 귀에 거슬릴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해보이려고 했죠. 제 전작들(하녀, 도둑들, 신세계)에 이어 이번 관상 역시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데, 배우라면 누구나 그 중에서 돋보이려고 할 거예요. 다른 배우들과의 조화에 신경 쓰면서도 그들보다 덜 보이면 안 된다는 ‘작은 욕심’이랄까요. 군중 속에서 관객들을 향해 ‘나 여기 있어요’라고 할 수 있어야 되니까 목소리·발성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편이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그가 이번 영화와 역할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었다. 데뷔 20년차, 하지만 아직 ‘중견’이라는 수식어는 붙이고 싶지 않은 ‘젊은 남자’ 이정재.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해본다.
현화영 기자 hhy@segye.com
사진=김경호 기자 still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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