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신장해야 성장률 3% 가능”
‘디플레 파이터’는 한은 아닌 정부…“소득 재분배 통한 소비 진작 유도해야”
[편집자 주]국내외 경제가 심각한 저성장의 늪에 빠지면서 경제지형 자체가 변화하는 모습이다. 그간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던 수출이 도리어 발목 잡는 역할로 전락하고, 성장세 회복을 위한 ‘키’로는 내수 진작이 꼽히고 있다.
또 핀테크의 등장, 업권별 장벽 철거, 대기업그룹 간 대형 인수합병(M&A) 유행 등 산업 구조와 재계 지도도 크게 바뀌고 있다.
본지는 6회에 걸쳐 경제지형의 변화 양상과 향후 대책에 관해 논해보고자 한다.
‘수출 역군’, 그간 우리 경제를 이끌고 가는 주역을 뜻하던 표어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부터 한국은 주로 수출을 통해 성장했으며, 수출이 국내총생산(GDP)의 50% 이상을 줄곧 차지했다.
그러나 최근 이런 현상에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GDP의 50% 이하로 내려간 수출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수출 성장세가 GDP 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양태다.
때문에 경제성장률 3%대 회복을 위해서는 내수 진작이 필수적인 요소로 꼽힌다.
◆저성장의 ‘덫’…심각한 수출 부진
(단위 : %/ 2015년은 한국은행 전망치) |
한국 경제가 몇 년 째 2%대 성장률을 벗어날 가망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2.5%로, 내년은 2.6%로 예상했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2.7%로 내다봤으며,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현재의 3.2%에서 하향조정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그밖에 여러 민간연구소나 글로벌 투자은행(IB)들도 내년 경제성장률을 2%대 중후반 정도로 전망해 L자형 경기국면이 지속되는 분위기다. 그나마 금융연구원과 산업은행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3%로 추산했으나, 신뢰도가 높지 않은 상태다.
장기 저성장의 주요 이유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정책금리 인상, 중국 경기 둔화, 엔화 후폭풍 등 대외적 요인이 꼽힌다. 즉 수출 부진이 경제성장률을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은에 따르면, 올해 GDP 중 수출의 비중은 46.2%에 불과했다. 특히 수출의 성장 기여도는 올해 3분기까지 다섯 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수출이 성장을 이끌긴 커녕, 오히려 성장동력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다.
한 한은 금통위원은 "우리 경제의 제일 큰 리스크는 수출 부진"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금통위원도 "신흥시장국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 우리나라의 수출 구조 상 내년에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교역이 확대되더라도 수출 실적이 전망치를 하회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다른 금통위원은 "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012∼2013년 중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며 "최근의 글로벌 교역여건 악화 등을 고려할 때 이러한 추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과거와 달리 수출 증가율이 경제성장률을 하회할 것"이라며 “향후 우리나라 경제는 수출이 성장을 견인하기 보다 수출에 의해 성장이 제약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경연은 내년 수출(국제수지 기준)이 0.9% 증가에 그칠 것이라고 진단했다. 경상수지 흑자도 올해의 1011억달러에서 내년 936억달러로 소폭 축소를 예상했다.
금융연구원의 내년 수출 증가율 전망도 0.4%에 그쳤다. 수출이 감소하면서 자연히 설비투자 증가율은 올해 5.2%에서 4.8%로 낮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임진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내년에도 수출 부진이 지속됨에 따라 설비투자 증가율이 축소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석태 소시에테제네랄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내년에 미국 금리인상과 중국 경제 경착륙 우려 두 가지 문제가 그대로 이연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병환 기획재정부 종합정책과장 역시 “대외여건이 크게 좋아지지 않을 것이라는데에는 동의한다”고 전했다.
◆성장세 회복의 ‘키’ 내수
김 과장은 “구조 변화의 키는 중국이 가지고 있다”며 “대 중국 수출비중이 큰, 수출 주도의 국가인 한국은 큰 변화에 직면해 있다"고 분석했다.
주된 변화는 수출 비중 하락과 내수 비중 상승으로 풀이된다. 금융연구원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3%로 꽤 높게 잡으면서 그 이유로 내수 진작 기대를 들었다.
임 연구위원은 “원자재 가격 하락, 경제 성장 등으로 누적된 가계소득은 올해에 비해 내년 민간소비 증가율에 유리할 여건을 형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해 1분기 국민총소득(GNI)이 4.2% 늘어난 반면 민간소비는 0.6% 증가에 그쳤다. 이런 이연효과가 작용해 내년에 소비를 확대시킬 수 있다는 기대다.
임 연구위원이 내민 내년 민간소비 증가율 예상치는 2.2%로 올해 예상치 1.9%보다 0.3%포인트 높았다.
오 수석이코노미스트도 “3년 연속 가계의 저축률이 올라가고 있다”며 “저축률 상승이 멈출 경우 소비에 상당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과장 역시 "올해 상반기 GNI가 6%대의 성장을 보였다“며 ”내년 즈음 시차를 두고 긍정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어 ”현재 가계 순저축률이 6%대인데 국민연금 등 가계 강제저축까지 더하면 11% 정도로 올라간다"며 민간소비가 늘어날 여지가 있음을 강조했다.
한경연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방편으로 중국 내수시장 공략, 선택과 집중형 연구개발(R&D), 신속한 사업재편 등을 들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수출 환경은 경기침체뿐 아니라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악화되고 있다”며 “중국의 수출 회복이 우리 수출 반등으로 직결될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내수 진작 가능할까?
다만 과연 내년 내수가 살아날 수 있을까에는 의문의 시선이 많다.
우선 내년도 정부의 재정지출 증가율이 크지 않다는 점이 걱정이다. 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올해 추가경정예산 예산이 생각보다 커서 하반기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됐다”며 “내년도 예산은 소폭 늘어나는 데 그쳐 내수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올해 내수 성장이 주로 건설 쪽에 치중된 점도 걱정을 키운다.
한은에 의하면, 올해 3분기 건설업은 전기 대비 5.6% 급성장했다. 지난 2009년 1분기 이후 최대 성장폭이다.
같은 기간 건설투자도 5%나 늘었다. 건설투자의 증가율은 모든 지출항목 부문 중에서 최고이며, GDP 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0.7%포인트에 달했다. 3분기 성장률 1.3%의 절반이 넘는 것이다.
문제는 내년 건설업의 전망이 별로 좋지 않다는 점. 건설업계 관계자는 “올해 건설업 호황은 부동산시장 활성화에 기인했다”며 “부동산시장 활성화는 수년간 누적된 부동산규제 완화 및 한은 기준금리 인하 덕”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하지만 내년에는 한은의 기준금리 인상 압력이 높다”며 “이미 시중금리가 상승세로 돌아서 부동산 전망이 좋지 않은 상태”라고 덧붙였다.
뿐만 아니라 1200조에 달하는 가계부채도 민간소비를 억누르고 있다. 통계청, 금융감독원, 한국은행이 공동 발표한 ‘2015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구당 평균 경상소득은 2013년 4658만원에서 지난해 4767만원으로 2.3%(109만원) 늘어나는데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원리금상환액은 830만원에서 952만원으로 14.7%(122만원) 증가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가계의 가처분소득 대비 원리금상환액 비율은 24.2%로 전년 대비 2.5%포인트 상승했다. 가계가 빚을 갚느라 쫓겨서 소비를 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한경연은 내년 민간소비가 1.9% 증가에 불과해 올해와 큰 차이 없을 것으로 추산했다.
역대 최악의 디플레이션도 내수 진작에 부정적이다.
한은은 올해 물가상승률이 0.7%에 머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IMF 위기’가 몰아쳤던 지난 1998년의 0.8%보다도 낮은, 역대 최저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LG경제연구원, 한국금융연구원은 내년 물가상승률을 1.4%로 전망했다. 정부는 그보다 낮은 1.3%로 예상 중이다.
개중 가장 높은 한은의 전망치(1.7%)도 물가상승률 목표치(2%)에는 미치지 못한다. 내년에도 디플레이션을 벗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최근 제조업체와 유통업체는 물건을 싸게 파는 것에만 집착하는데, 이는 ‘디플레 스파이럴’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높다”고 지적했다.
가격을 낮추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 가장 편한 비용 절감책은 구조조정이다. 그러나 고용이 감소하면, 그만큼 가계소득이 줄어 소비가 더 얼어붙는다.
국가 경제 전체가 ‘디플레 스파이럴’의 함정에 빠져 내수 확대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소득 재분배·사회적 안전망 필요
이런 디플레이션의 해결 필요성은 모두가 인식하고 있다.
최근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은이 '디플레 파이터'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장병화 한은 부총재가 ‘디플레 파이터’ 역할에는 긍정했지만, 당장 기준금리를 인하하거나 돈을 더 풀 생각은 없다고 전했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한은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금리조정뿐인데, 연준이 금리를 올린 이상 더 이상의 기준금리 인하는 불가능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한 금통위원은 “그간의 완화적 통화정책에도 불구하고 내수의 순성장 기여도가 계속 2.3∼2.5% 수준에 그치고 있다”며 통화정책의 한계를 거론했다.
때문에 ‘디플레 파이터’ 역할은 결국 한은이 아니라 정부가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드높다. 특히 소득 재분배와 사회적 안전망 확충이 요구된다.
지난해 소득 5분위 가구(소득 상위 20%)의 평균 소득이 1억930만원으로 전년 대비 195만원 늘었다. 반면 소득 1분위 가구(소득 하위 20%)는 35만원 증가하는데 그쳤다.
특히 소득 5분위 가구 비중은 0.2%포인트 축소된 데 반해 소득 1분위 가구 비중은 0.1%포인트 확대됐다. 점점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소득불평등은 곧 소비 부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경제의 상식이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대체로 소득이 적을수록 소비성향이 높아진다”며 “고소득자의 소득만 늘고, 저소득자의 소득이 증가하지 않으면, 소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소비성향은 71.5%에 불과해 역대 최저치를 찍었다.
올해 들어 민간소비 증가율(한은 통계)은 1분기 0.6%, 2분기 -0.2%로 극히 부진했다. 3분기에 겨우 회복된 수치가 1.2%일 뿐이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 들어 복지 수준이 계속 후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허약한 사회적 안전망은 소비자들을 불안케 해 소비를 더 제약한다”며 “소비 증대를 위해서라도 복지 확충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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